금일, 국립 현충원을 현장취재했다. 집에서 카메라를 들고, VDO 영상까지 챙기고, 노트북도 담았다. 그때다. “나는?”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 내가 여기에 있는데, 또 누가 “나는?” 성경이 자꾸 자꾸 가방속에 들어가려고 한다. 어쩌나? 정말 어쩌나? 무게가 묵직하다. 전쟁에 나서는 군인은 완전무장을 꾸리고서, 최대한 무게를 줄여야한다. 나는 금일, 노트북과 카메라와 영상을 모두 챙겨야하는 데, 수요일이다. 그래서, “아멘”하고 성경을 넣고, 대신에 “우산”을 뺐다. 까짓것, “성경이 우산이 되리라”고 믿고 출전했다. 비가 방울방울 쏟아지는데, “성경이 우산이다.”를 암송하면서, 시편 2편을 묵상하면서, 현장에 갔다. 역시, 성경이 우산이다. 비가 멈췄다.
인생은 금방 끝난다. 하루 꿈과 같다. 지금 살아있으니까, 영원히 살 것 같지만, 금방 끝난다. 히브리서 3:13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라고 했다. 우리는 평생, ‘오늘’을 살 뿐이다. 인생에게 ‘과거’와 ‘미래’는 없다. 인생은 오로지 ‘오늘’을 느끼고 살 뿐이며, 그것이 인생전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주님은 위대한 진리를 발표했다. 마르다에게 한 약속의 진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11:25~27)
또한 38년된 병자를 베데스다 못가에서 고치신 후에, 현재적 그리스도의 임재를 선언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5:24~25)
“곧 이 때”는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현재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주님을 믿을 그 때에 “영생”을 얻는다. 영생은 ‘지금과 오늘’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말씀과 성령으로 그것이 가능하다.
나는 지난 30년 동안 성경구절을 ‘몇장 몇절’로 암기했다. 요즘은 그것을 하지 않고, 성경자체를 암기한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와 바울은 성경구절을 몇장 몇절로 암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문서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편하게 만든 것이고, 성경말씀 자체를 암송해야한다. 마태복음 3장에서도 세례요한은 “광야의 소리”로서 나타났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하나님도 “소리”로서 임재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소리”로 유혹하자, 주님도 “소리”로서 물리쳤다. 산상수훈도 산에 올라가서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왔고, 그때 주님은 “입을 열어” 가르쳐 말씀했다. 입술을 열어서, 혀로 말하게 하라!!
마태복음 27:50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이 묘사된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주님은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부활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마리아야”라고 부르면서 나타나셨다.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소리로 인사하며 나타나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셨다. 소리는 말씀을 입술로 말하는 그것이다. 우산 대신에 성경을 챙겨서 나온 오늘,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