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으라”는 원어로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다. 더 깊게 해석하면, 창세기 1:2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 성령을 뜻한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고, 그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살라는 것이다. 성령을 받고서, 그때 “산아! 바다에 던져지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이뤄질 것을 믿고, 마음에 의심이 없으면, 그대로 된다. “언어”가 입술에서 나갈 때, “성령”께서 “불덩이”로 함께 입혀서 나가니, 힘있는 말이 실제 운동력을 가진다. 말의 권세는 성령을 받고 하는 말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99억의 여자 (드라마)에서 말하듯, 통장속에 99억원이 들어와서, 자신의 소유가 된 것과 같다. 성령속에 심령이, 심령속에 성령이 함께 하면서, 성령과 심령이 하나로 일체된다. 밥을 먹듯, 성령도 실체로 임한다. 성령의 미세한 불이 심령의 심지에 불을 붙이니, 영혼이 성령으로 불탄다. 성령충만은 성령으로 불타는 삶이다. 불에 타면, 화재현장에 아무 것도 남지 않듯, 성령으로 불타면, 자기 존재는 사라진다. 오직 성령으로 살아간다.
마가복음 11장의 대전제는 “하나님을 믿으라”이다. 헤롯성전이 무너지는 예언도, “하나님을 믿으라”와 직접 상관있다. 성령이 모든 성도의 심령가운데 직접 임하는데, 건물성전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세상권력의 폭우를 잠시 피하기 위해서 “우산”처럼 건물을 사용할 뿐, 성령은 건물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다. 귀신들도 사람의 육체속에 들어와서 살길 바라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마음속에 성령이 없으면, 악령이 차지하고, 숨어버린다. 사람은 그것을 모를 뿐이다. 마음의 자리를 성령께 드려야한다. 그것이 아니면, 인생은 희망고문만 존재할 뿐이다.
베드로가 위대한 사도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보다 더 뛰어난 자들이 많았고,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물세례까지 하고, 안드레와 사도 요한을 전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한 위대한 선지자였는데, 베드로처럼 주님을 증거하지는 못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겪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할 때, 성령을 받고서 완전히 달라졌다. 성령을 받고 성경을 보니, 성경이 불이 되어서 심령을 새롭게 갈아 엎었다.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한다. 성령을 받으면,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면서, 창공을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홍해도 그냥 날아가고, 절벽에서 비상한다. 성령은 비둘기가 날아서 평화를 선물하는 것과 같다.
주님은 죽음으로 ‘성령’을 제자 공동체에 물려주셨다. 신앙의 상속은 곧 “성령”이다. 성령을 받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다. 학문의 최고 목표가 “대학”이라면, 기독교는 “성령”이다. 기독교가 믿음의 종교라고 불리는 것은 “성령의 믿음”이 밖에서 안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데, 성령께서 심령가운데 임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성령께서 성도의 심령에 임하면, 그때 성도는 “성령의 탄생”으로 새롭게 신분세탁이 된다. 위조 여권으로 신분세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음이 바뀌고, 새롭게 변화하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딸이 된다. 성령을 받을 때,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 성령을 받으면, 희망고문이 희망으로 변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이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의 주님이 곧 “성령”이다. 성령은 집단주의를 무너뜨리면서 모든 성도에게 각각 임한다. 성령은 특권층의 특별한 존재에게만 임하지 않고, 성령충만을 간절히 염원하는 자에게 임한다. 사람도 불러줄 때, 그때 대답하듯, 성령도 찾는 자에게 역사한다. 인격의 성령, 그를 영접하는 자에게 “만유의 공동상속자”로서 권능도 함께 임한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속 맘몬신이 멸망하고, 비로소 돈이 들어온다. 돈이 왔다가 나갔다가, 왔다갔다하는 이유는 돈이 주인행세를 해서 그렇다. 성령을 받으면 ‘돈’은 ‘개처럼’ 복종하고, 성령을 받지 못하면 사람이 “개처럼” 돈을 섬긴다. 돈을 섬길 것인가? 돈을 부릴 것인가? 성령으로 결정된다. 이것이 성령특권이다. 성령께서 모든 피조물을 창조했으니, 성령께서 ‘돈’도 다스린다. 사람은 스스로 돈을 다스리지 못한다. 성령과 함께 할 때만 그러한 능력이 생긴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고, 성령과 함께 자유하다. 성령은 ‘나의 예수’를 부르는 호칭이다. 결혼하면, 사랑하는 자를 “여보와 당신”으로 부르듯, 예수님이 곧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나의 예수님’이 심령속에 있으니, 언제나 예수님과 십자가를 찬양하며, 구원을 창조하신 성령께서 창조역사와 구원역사를 실제로 펼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