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왜 드리는가? 이 질문은 “왜 제사를 드리는가?”와 같다. 예배와 제사는 동질성이며, 그 대상이 같다. 단지, 제물과 방법이 달라졌다. 구약에는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리고, 신약에는 사람이 제물이 되어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근본은 그렇지 않다. 구약시대에도 동물을 가지고, 사람이 함께 제사를 드렸다.
아벨과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도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고,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사람과 제물은 일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도 사람이 제물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을 제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헌금을 하는 것이다.
동물을 죽여서 피를 내듯,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렸고, 우리는 십자가의 화목제물로서 ‘동물의 피’가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할례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거룩한 제물’이다. 동물이 죽어서 피를 봐야한다. 그처럼, 사람은 마음이 상해서, 꺽여서, 애통해서, 낮아져서, 가난해서, 절망해서, ‘상한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야한다. 마음이 ‘피흘리는 동물’처럼 낮아지는 상태, 그것이 바로 ‘죄인된 심령’이다. 하나님은 ‘죄인으로 슬퍼하고, 애통하는 심령’을 제물로 받으신다. 의의 제사는 ‘죄인된 심령’의 제사다.
구약시대 제물에는 동물제사와 곡물제사 모두 ‘소금’이 들어간다. 소금은 언약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 나오는 ‘소금과 빛’은 제물로서 ‘사명’이 내재된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바깥에 버려짐을 당하듯이,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거룩한 제물’로서 살아야할 소명을 갖게 된다. 세속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 그것이 소금의 소명이다.
요한복음 4장과 로마서 10장에 ‘소금의 소명’이 나온다. 예배자의 사명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며, 마음과 삶, 모두 거룩함을 가져야한다. 이것이 영적 예배이며, 마음의 중심은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고,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이다.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으로 흐르거나 교회 제도에 갇히면, 예배는 세속화된다.
예배의 거룩함은 ‘진리의 성령’에 있으며, 성도의 심령에 성령이 임하고, 단상의 말씀은 성경의 원음이 선포되며, 십자가의 거룩함이 피흘림을 당하듯 생중계되어야한다. 십자가의 피흘림이 단상에서 ‘오늘도’ 흐르고 있는가? 십자가의 피흘림이 멈췄는가? 십자가의 피흘림은 강물과 같아서, 지금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서 13:8의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요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