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5:23]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잠4: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언 4:22에 나오는 ‘그것’은 ‘내 말’과 ‘내가 말하는 것’ 두 가지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성경말씀’이며, 그 성경말씀이 각자 심령에게 들려지는 진리의 성령, 곧 ‘레마’이다. 성경말씀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육체의 건강이 된다.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말씀을 중심하는 교회다. 모든 교회는 ‘성경’을 정경으로 두고, 성도들은 교회에 갈 때 성경을 가지고 간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인가? 그 성경이 인생의 근본이며, 매일의 주식(主食)인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할 때, 그 양식은 먹는 것과 함께 영혼의 양식도 된다. 주님은 유대광야에서 40일 굶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았다. 말씀이 곧 영혼의 주식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건강하다.
내가 만약, 성경말씀의 로마서보다, 루터의 성경강해집을 사랑한다면, 나는 루터의 책에 중독된 것이다. 이것은 탈출해야할 ‘우상’이다. 루터의 성경강해집이 성경말씀을 보다 깊게 알려주는 책일지라도, ‘등불’에 불과하다. 등불은 ‘빛의 실체’를 알려주는 것이지, ‘빛’ 자체는 아니다. 등불이 빛을 가린다면, 등불은 우상이다. 스스로 점검해야한다. 루터의 성경강해집 자체는 ‘우상’이 아니다. 내가 루터의 성경강해집을 성경보다 더 위에 둔다면, 내게 있어서 루터의 성경강해집이 ‘우상’이 된 것이다.
나는 드라마를 본다. 내가 드라마를 볼 때, 드라마에 빠져서 본다면, 그 또한 유익이 없다. 반면, 드라마를 통해서 영적인 관점, 성경적 관점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을 본다면, 그곳에서도 신령한 양식을 먹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난다고 했고, 바로왕을 완악하게 하신 것도 성령의 역사라고 했다. 바로왕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세상 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깨닫게 하실 것을 깨우친다. 성도든, 교회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는 ‘건강함’을 유지할 때, 세상 것들도 유익이 있다.
옛날에 30년간 다녔던 교회는 선교방법이 탁월했고, 대학생들에게 맞는 성경교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30개론이었고, 토요공개방송이다. 토요공개방송은 단상에서 맘껏 즐기면서 놀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발상의 전환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성경말씀’이 후순위로 밀려났고, 거룩한 단상은 오락으로 짓밟혔다. 육성이 강해지면서, 영성은 사라졌다. 결국, 남는 것은 육체의 소욕외에 무엇이던가? 30개론이 성경보다 위에 있으니, 이 또한 심각한 부작용이다.
나는 성경말씀위에 서있기를 고집하며, 그것외에는 모두 참고서에 불과함을 스스로 고백한다. 성경말씀을 암송하고,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알려주신 영성훈련법이다. 이 글은 잠언4:22과 엡5:23을 토대로 작성되었으니, 두 구절을 100번 정도 읽으면서 암송하는 것이 영혼의 건강에 유익이 된다. 이 칼럼은 1번만 읽어야지, 반복해서 읽으면 성경말씀이 가려질 수도 있다. 극히 조심해야한다. 성경말씀 외에 무엇이 영혼에게 유익하랴!!
PS.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 8회를 봤다. 현빈(리정혁)이 손예진(윤세리)를 구하려고 총맞은 몸으로 산속 별장에 잠입했다. 윤세리는 위장결혼을 해서라도 북한을 탈출할 계획인데, 갑자기 나타나 목숨을 걸고 싸우는 리정혁을 향해 ‘사랑의 본질’을 느낀다. 과연, 사랑이 무엇인가? 철학적 궤변은 사랑이 아니다. 옛날 교회는 ‘사랑’을 매우 추상적으로 정의했다. 성경과 달랐다. 성경은 십자가의 사랑을 말한다. 십자가를 통해 미래에 올 사람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리정혁’의 몸짓에서 보였다.
리정혁을 애써 외면한 윤세리!! 그런데, 함박눈이 쏟아진다. 윤세리는 리정혁이 마음에 밟힌다. 추울텐데, 추울텐데….. 그래서 차를 끌고 나갔다. 리정혁을 태워서 출발하려고 하는데, 차에 기름이 없다. 눈이 쏟아지는 절망속에, 차는 꼼짝없이 멈췄다. 그런데, 옆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창조주께서 옆에 계시면, 불가능한 상황이 더욱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암흑과 불가능은 창조주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전조현상이다. 모세의 10대 재앙에서 9번째가 암흑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에는 출애굽의 빛이 ‘홍해’를 통해 드러났다. “학교로 가요”라고 리정혁이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어디든지 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따뜻한 별장도 ‘겨울’이다.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하면, 겨울도 봄이다.
그곳에서 피운 모닥불!!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셨다. 그것은 외부적 도우심도 있지만,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이 각자 심령가운데 불처럼, 구름처럼 임재했다는 뜻이다. 과거를 청산해야겠다는, 홍해를 건너야겠다는, 사막을 걸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귀때기>
귀때기는 도청이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이다. 몰래 도청장치를 해서, 사람들의 말을 엿듯는 전문 도청장치가 있는데, 리정혁은 호텔방에 설치된 도청장치는 발견하면서, 정작 자신의 집을 도청하는 전봇대의 도청은 모른다. 안에 설치된 것이 아니고, 밖에서 몰래 엿듣기 때문이다. 옛뱀이 그렇다. 창세기 3장에서도 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알고서 그것을 살짝 변경했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마귀는 세례받을 때 들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뱀들은 ‘새처럼’ 날아와서 말씀을 쪼아 먹는다. 그래서, 말씀을 입술로 계속 읇으면서, 마음속으로 뿌리가 내리게 해야한다. 세상 잡념이 가득차면, 말씀은 금방 증발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엿듣는다. 새들이 듣지 못하도록 마음속에 말씀을 감춰야한다. 새와 쥐가 말씀을 도청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서 내면에 뿌리를 내려야한다. 마음에 뿌리내린 말씀은 새와 쥐가 뺏어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