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법원에서 판사가 “유죄”라고 판결하면, 그때 죄인은 감옥에 간다. 반면, 하나님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꿔서 영접한다. “죄인”으로 판결한 그 순간, “의인”이 된다. 이것이 곧 이신칭의(以信稱義)다. 형사재판에서 ‘집행유예’가 있다. 2년 실형, 3년 유예판결이 떨어지면, 그 사람은 유죄이지만, 무죄다.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면, 예수님께서 ‘죄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죄인은 즉시 무죄로 방면된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탕자를 영접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대표적인 ‘이신칭의’ 사건이다. 15장 도입부에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판이 있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기에는 ‘죄인’이었고, 예수님이 보기에는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의인’이었다. ‘용서’와 ‘죄사함’의 차이로 극명한 대립을 이룬다.
상속재산은 균등하게 각각 나뉘었고, 둘째는 자기 것을 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창녀를 만나 허랑방탕하게 살았다. 모든 재산이 사라졌고, 돼지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살다가,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라고 했다. 환경이 돼지 쥐엄열매를 먹게 되면, 그때 하나님이 생각난다. 탕자가 실제로 돌이켰는지, 돌이킨 척 했는지, 그 당사자가 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스스로 돌이켜”라는 문장을 통해서, 탕자는 인생의 바닥에 던져짐으로 돌이켰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대부분 제자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망쳤다. 자기 분깃을 가지고 먼 타국으로 간 탕자처럼 예수님과 결별하고, 엠마오로 낙향하고, 제 갈길로 돌아갔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까지 찾아가서 그들이 스스로 돌이키도록 말씀과 사랑으로 권면했다. 탕자는 스스로 돌이켰지만, 인생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데는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도덕적 참회는 자신의 양심을 보게 하고,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을 보게 하면서, 십자가의 피흘림이 대속의 화목제물로 믿어지게 한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는데, 아버지가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한다. 먼 타국에 간 탕자도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다. 죄인도 하나님께는 여전히 ‘아들’이다. 맏아들이 상당히 과격한 단어로 동생을 비판해도, 아버지가 볼 때는 탕자도 아들이다.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형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