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언어는 일반 언어와 조금, 또는 깊게 다르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면 헤깔린다. 가령, 이사야 40장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을 읽으면서, 세상의 헛된 욕망은 사라진다고만 생각하면, 그것은 단세포적 성경읽기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과연, 누가 돈을 싫어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싫어하는가? 주님께서 유대광야에서 돈과 밥과 능력과 세상권력을 모두 거절했지만,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것을 싫어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염세주의(厭世主義)가 아니다. 주님께서 염세주의자였으면, 유대광야에 계속 머물면서 혼자 수도생활을 했을 것이다. 주님은 갈릴리로 가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하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풀과 꽃이 시들면,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임하게 된다. 마태복음 24장 말씀처럼, 해달별이 떨어지면 그때 인자의 영광이 드러난다. 이것은 진실하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은 너무 작고, 주님이 행하실 일은 너무 거대하다. 그래서, 안드레가 오병이어(五餠二魚)를 주님께 드리니, 그 오병이어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니, 들판에 있는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는 창조적 능력이다. 오병이어는 ‘풀과 꽃’이요, 오천명을 먹이신 주님의 능력이 ‘말씀의 창조력’이다. 우리의 꿈은 시들어도, 하나님의 꿈과 함께 이뤄진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께서 행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어떤 이단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뜻이 깨졌다고 해석한다. 너무 성경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누가 다스리는가? 마귀가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마귀를 물리치신 분이 바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마귀를 물리쳤으니, 지구촌에 있는 모든 나라의 주권은 예수님께 속했다. 그따윗 헤롯정권은 아무 것도 아니다. 헤롯정권은 이장 정도에 불과하다. 주님은 로마제국을 비롯해서 장차 올 모든 세계의 주권을 놓고 십자가에서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승리하셨다. 그래서 주님께 속하면, 세상을 능히 다스린다.
비유로 말하면 이와 같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윤세리가 돌잔치에서 3개의 물건을 골라야하는데, 돈과 실과 책이 있었으나 윤세리는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오직, 아버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아버지의 손을 붙잡으니, 후계자가 된 것이다. 그와 같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순복했고, 말씀을 이루셨다. 그로 말미암아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마귀들은 주님의 발 아래 놓였고, 세상 권력도 주님께 속한 것이다. 외딴 마을에서 이장이 되려고 꿈꾼 자가 모함을 받고 쫓겨나 버려짐을 당했는데, 그 나라의 공주와 극적으로 결혼했다면, 그 외딴 마을은 능히 다스린다. 외딴 마을의 이장을 원하는가? 왕국의 상속을 원하는가?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육체의 정욕이 풀처럼, 꽃처럼 올라온다. 어쩔 수가 없다. 그때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고, 찬송을 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암송하면, 하나님의 기운이 마음의 수면위로 운행하면서 풀이 사들고 꽃이 마르게 된다. 육체의 풀과 꽃이 시들어야 하나님의 총명과 지혜가 마음을 다스리면서 보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의 생각은 기껏 잡풀에 불과하고, 들풀 수준이다. 들풀이 꽃을 피우기 전에 시들면 금상첨화다. 그것들이 사라지면, 말씀의 생명나무가 성장하고, 성령의 강물이 흘러간다. 무엇이 더 월등한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로움보다 지혜롭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형통함을 준다. 하나님은 믿는 성도에게 그 소원을 뜻으로 두시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내 마음을 불태워 화전(火田)한다. 화전이 끝나면, 옥토밭이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