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디게아 교회는 가장 부유한 교회였다. 부자교회인데, 하나님은 가장 가난하다고 심판했다. 칭찬이 전혀 없는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다. 그렇다면, 부유한 것은 죄인가? 그렇지 않다. 부유한 것이 문제가 아니고, 부유함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다. 가난한 교회는 하나님을 진실로 찾을까? 가난하든, 부유하든, 십자가의 도를 누가 끝까지 지키느냐가 관건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하게 살았다. 신앙은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하나님의 원음’을 전해야한다. 이것 저것 섞어서 술에 물탄 듯, 그렇게 전하면 성령이 역사하지 못한다. 성령께서 역사하려면 성경의 원음, 진리를 전해야한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성령이 하는 것이지, 사람이 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홍해가 갈라지게 하라”고 했을 때, 모세는 말씀대로 했다. 그때, 성령께서 동풍을 밤새도록 일으켜서 홍해가 갈라지게 했다. 진리의 원음을 그대로 전하면, 그 말씀이 사람의 심령속에 들어가서 성령이 마음을 바꾼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미지근하게 전한 것이 분명하다.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 주님은 노골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신다. 그들이 자부하는 것이 안약치료제이고, 직물공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의학적으로 상당히 발달한 도시였고, 의류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패션의 도시이며, 의학의 도시였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벌거벗은 수치”라고 지적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흰 옷’을 입었는가? 날마다 주님앞에 물어야한다. 입지 못했으면, 주님께 “흰 옷”을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벌거벗었으면서, 주님을 찾지 않으면, 어디서 의로운 흰 옷을 입겠는가? 흰옷은 오직 주님께서만 주신다.
글쓰는 작가로서, 나는 글의 부요함에 빠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의 지성은 칡넝쿨처럼 뻗어 나를 휘감는다. 지식이 치솟으면 영성은 짓밟힌다. 어쩔 수가 없다. 지성과 영성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다. 나의 지성을 내려놓고,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염원하면, 한줄의 성경을 읽어도 내게 깊은 영성의 물결이 흐른다. 성령이 성경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맛이 없다. 성경의 안주인은 성령이다. 축복은 곧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헤롯성전을 자랑했다. 그 내면에는 애국심의 옷이 입혀진 것이다. 애국심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의 무화과 잎에 불과하다.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다. 오직, 주님의 의로움을 통해서만 죄악된 인간의 내면이 가려진다. 그래서, 헤롯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님은 예언하셨고, 제자들의 심령속에 있는 애국적 성전도 무너지길 축복하신 것이다.
내면에 있는 민족주의가 없어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한다. 천국과 민족은 전혀 별개다. 마음에 민족주의가 가득하면, 천국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민족주의도 얻고, 천국도 얻고, 일석이조는 없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천국을 진정 바라는 자는 주님이 그 마음에 임할 것이고, 주님 뜻대로 살 것이다. 주님께는 민족주의도,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바람에 날아가는 겨에 불과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영원히 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