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5장에서 주님은 죽으시고, 묻히시고, 16장에서 부활하셨다. 이제, 억울한 재판에 대해 충분히 ‘재심’을 하거나, ‘불법’을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주님은 전혀 그런 언급이 없다. 전혀 없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다. 주님을 ‘죄인’으로 판결한, ‘사형’으로 판결한 그 사건은 하나님의 뜻이라서 그렇다. 만약,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재판”을 “재심청구하라”고 했다면, 그래서 “무죄”가 판결된다면, 우리의 죄는 누가 대속할 것인가?
복음서를 구석구석 읽어봐도, “재심”은 없다. 또한, “재판과정”에 대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있다고 주장되지만, “사형판결”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모두 언급한다. 왜 그럴까? 주님께서 모든 백성의 대표로서 그곳에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주님 본인이 아니었다.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으니,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한 그 음성에는 우리의 이름도 들어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부활하셨을 때, 우리의 죄도 함께 죽고, 묻히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무슨 억울한 못질을 당하면,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감당하길 권면한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다짐했다. 과거를 돌아보면, 잊혀지지 않는 고통이 나를 엄습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이름이 떠오른다. 그 이름에 나는 분개할지라도,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니, 나는 기꺼이 그 이름위에 십자가의 축복을 선물한다. 내 이름위에 십자가의 축복이 있으니, 내게 원수된 자들의 이름위에도 십자가의 축복이 있기를…..
만약, 주님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면, 부활하시고, 40일이나 있었으니, “죽음”에 대해 분명히 말씀했을 것이다. 더불어, 로마법과 유대법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죽음”과 관련된 “권력의 비리”를 폭로했을 것인데, 제자 공동체와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파했다. 십자가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구원의 증표라고 외쳤다. 이것만 보더라도, 십자가는 죄사함의 권능이다. 또한, 십자가는 구원의 창조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