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시험했다. ‘표적’을 구했다. 이들은 스스로 예수님께 와서 물었으나, 근본은 사탄이 보낸 것이다. 본인들은 모른다. 마태복음 4장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이 마태복음 16장에서 구체화된다. 그들은 정치적 독립과 같은 ‘다윗 왕권의 부활’을 원했다. 그것을 성취하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가 주어진다.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곧바로, ‘누룩’ 이야기가 나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히려 떡 걱정을 한다. 비유를 못 알아듣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줘도, 자기의 인식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소통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하나님과 소통하려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아야한다. 미국인과 소통하려면 영어로 대화를 해야하듯이, 영적 소통은 영적 감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는데, 제자들은 떡생각이 가득하니, ‘누룩’에 방점을 두고서 ‘떡’을 걱정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못 알아듣자, 다시 풀어서 설명하신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표적을 거론하자, 제자들은 ‘누룩’의 비유를 알아차린다. 그처럼, 영적 감각이 흐려지면 주님은 우리가 겪은 과거의 표적을 생각나게 하신다. 주님께서 역사해서 큰 환란을 극복했던 사건이 다시 떠오르면, 그것은 그 사건을 통해 현실을 이해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주님은 사랑이시니, 계시를 못 풀어도 이해하시고 다시 설명하신다.
베드로가 분명히 주님을 깨달았다. 17:20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했다. 이때,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인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요구했던 그리스도는 ‘정치적 그리스도’이다. 반면,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말했다. 요나는 3일동안 고래 뱃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서 니느웨성에서 ‘회개하라’고 복음을 외쳤다. 요나는 니느웨성처럼 반대방향으로 가서, 니느웨성의 죄값을 대신 치르듯, 배에 탄 사람들을 대신한 희생양으로 고래 뱃속에 빠졌다. 요나는 대속적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독특한 선지자다. 마태복음 16:21에서도 주님은 ‘그리스도’에 대해 핵심적으로 설명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6:21)
그런데, 베드로가 항변하며 “주여! 그리 마옵소서”라고 반대했다. 십자가를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사탄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통해 예수님을 시험했고, 베드로를 통해서 막았다. 주님은 속지 않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분명하게 책망했다. 사탄이 덤빌 때는, 망치로 내리치듯 깨뜨려야한다.
주님은 노골적으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했다.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뤄진다. 첫째, 주님의 십자가요, 둘째 자기 십자가다. 내가 30년간 있었던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식적으로 인정하면서, 본인은 ‘심정의 십자가’를 진다고 해석했다. 심정의 십자가만 지면, 마음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삶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한다. 이것이 성경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