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점심에 쟁반짜장, 저녁에 굴떡국을 먹었다. 맛있었다. 살면서, 인상깊은 장면은 각인된다. 창세기에서 선악과 사건, 홍수심판, 이삭의 번제사건은 잊혀지지 않는다. 특별히 드러나는 사건이라서 그렇다. 복음서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는데, 오병이어와 십자가와 무덤부활이다. 복음서에서 오천명과 사천명을 먹였던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표적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오병이어 사건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 모두 등장한다. 곧, 실제 사건이었다.
어떤 종교단체에서는 12바구니와 7광주리를 거뒀으니, 그것은 열두 사도와 일곱 사도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것도 그럴듯해 보이지만,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실제 사건이다. 그때, 들판에 있던 무리들은 실제로 배가 고팠고,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되었고, 주운 것이 12바구니요, 7광주리였다.
만약, 사도들을 바구니와 광주리로 비유했다면, 왜!! 오병이어 표적에서는 ‘바구니’였고, 칠병이어 표적에서는 ‘광주리’였을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분명히 두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과거 사건을 거론하면서, ‘바구니’와 ‘광주리’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오병이어 표적에서는 ‘광주리’가 아니다. 바구니는 작은 것이요, 광주리는 매우 큰 것이다. 헬라어도 두 단어가 명확히 다르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실제로 12바구니로, 7광주리로 거뒀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오병이어가 12바구니로 변환된 것이고, 칠병이어가 7광주리로 돌아온 것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것과 같다. 예수님의 죽은 육체가 부활해서 새로운 영체로 살아난 것과 같다.
제자들은 “떡”을 또 걱정했다. 그래서, “떡”은 그만 걱정하라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을 환기시킨 것이다. 머리에서 “떡”이 사라지니, 그제서야 “복음”이 보이면서,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주님은 내가 “떡문제”를 걱정하면, 항상 “직장을 그만 둔 때”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직장을 10년전에 그만뒀다. 월급없이 살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지금껏 잘 살고 있다. 내가 봐도 내가 신비하다. 그래서, 떡문제는 걱정하지 않는다. 떡문제가 마음에서 사라지면, 그때 말씀이 읽힌다. 그처럼, 제자들도 “떡문제”가 사라지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확히 들어왔다.(떡문제는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첫 번째 시험문제다.)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마16:9)
“기억”은 곧 “사건에 대한 기억”이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거둔 사건이니,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냐고 주님이 물으신 것이다.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깊은 데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지게 물고기가 잡혔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의 부활후 153마리 물고기가 잡혔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고, 실제 물고기다. 그처럼, 12바구니와 7광주리는 실제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서 3일동안 있다가 그 육체가 살아났듯이, 예수님도 무덤속에 3일동안 있다가 그 육체가 영체로 살아났다. 육체의 영체부활 사건은 실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