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전에 작성된 누가복음에는 “천국이 언제 오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요즘, 우리의 질문과 흡사하다. 미래사회 청년들도 같은 질문을 던지겠다. “천국은 언제 오는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천국은 마음에서 이뤄지며, 주님을 통해서 이뤄진다. 이것을 모르면, 천국이 임하는 것을 못 본다.
“아직 천국이 아니다”고 하는 사람은 천국을 맞지 못한 것이다. 주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 주님이 곧 천국의 문이니, 주님을 통해서 천국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주님의 문은 어떻게 열 수 있는가? 믿음이다. 그 믿음은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 “의를 세우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의를 세우라, 천국이 가깝다”고 한 곳이 없다. “회개하라!”가 먼저 있다. 곧, “죄인들아! 천국을 맞이하라”이다. “탕자들아! 천국을 맞이하라!”이다.
자애로운 아버지는 집밖에 있는 탕자와 집안에 있는 탕자에게 모두 “회개하라! 잔치가 가깝다”고 외쳤다. 멀리 있던 탕자는 와야할 시간이 있으니,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고, 가까이 있는 장자는 앞에 있으니 천천히 복음이 전파되어서, 그날 아버지가 말한 것이다. 탕자를 위해 잡은 송아지가 과연 ‘탕자’만을 위한 것일까? 아버지와 장자와 탕자를 위해 잡은 ‘송아지’였다. 그 잔치에 참여하려면, “저는 탕자입니다. 저는 불효자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야한다. 의로운 잔치에 참여하는 조건이 그것이다.
누가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실족”에 대해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고,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다. 그때, 제자들은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한다. 다른 말로, “어찌 용서할 수 있습니까”라고 되묻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의롭다’는 의인의식이 생겨서 그렇다. 과연, 주님을 믿음으로 기도생활을 하고, 연륜이 생기면 그것이 의로움인가? 만약, 믿음생활을 열심히 하고, 3년 기도생활로 의로움이 생긴다면, 그 의로움이 구원에 이르게 했는가? 전혀 아니다.
사람은 본래 죄인이며, 주님을 믿어서 만약 의로움이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흙에서 와서, 의로움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고염나무는 고염을 열 뿐이다. 고염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접붙임의 결과요, 성령의 능력이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됨”을 기억하면서, 누군가의 “죄”를 보거든, 그 사람이 참회한다면 용서해야한다. 또한, 참회하지 않거든 하나님께 “중보기도”로서 용서를 대신 간구해줘야한다. 어떤 죄인을 보거든, 그때 그 죄인을 향해 ‘정죄’를 하는지, ‘긍휼’을 갖는지, 자신을 들여다 봐야한다. 죄에 대해 정죄하면, 그것은 선민사상의 잡풀이 다시 생긴 것이다. 자기 의를 믿으면, 남을 정죄한다.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면, 남을 향해 긍휼을 갖는다.
나병환자 10명이 고침받은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데, 10명 모두 고침을 받았다. 그 중에서 사마리아 문둥이만 주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 동방박사처럼 어떤 예물을 가져온 것도 아니다. 입술의 예물, “감사”를 드렸는데, 그것으로 구원을 받았다. 때에 맞는 입술의 감사는 구원에 이르게 한다. 날마다 일어나면, 주님께 감사 찬양, 자기전에 주님께 감사찬양을 드려야한다. 일어나서 주님께 감사, 자기전에 감사하면,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니,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