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다. 문턱을 넘어서면, 방안이다. 이제 자리만 잡으면 된다. 영어의 문턱을 넘어섰으니, 자리매김만 하면 된다. 1월 18일, 나는 영어의 창조가 시작됐다. “기독교인은 성경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는 김현숙 학과장님의 권면은 내게 양약이 되었고, 6년근 홍삼을 먹은 듯 의욕이 솟았다. 1월 19일 새벽 5시, 산상수훈의 도입부를 영어 NIV로 암기했다. 젊은날, 대학시절 구입했던 영어성경이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다.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이 문장이 내 마음을 울린다. 물론, 앞의 문장도 내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어서, 거기에 풍선에 헬륨을 넣듯이 ‘생기’를 불어넣었다. 어제, 김현숙 학과장님은 최소한 내 마음에 ‘영어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 생기가 내게 영어성경을 열게 했으니, 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능을 직접 경험한다.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가령, 예수님은 무리를 보고, 산에 올라가 앉으니, 제자들이 나아왔다. 그때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러한 행위동작은 일상에도 빈번히 발생함을 알게 됐다. 그전에는 산상수훈을 갈릴리의 신상수훈으로만 알았는데, 어제는 대양홀의 수많은 무리를 보면서 국제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김현숙 학과장님과 조교가 학생들을 데리고 베트남 쌀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 학과장님은 학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면서, 영어공부의 방향에 대해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산상수훈은 곧 베트남 쌀국수 집에서도 이뤄진다.
누군가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모든 인생은 잠자는 흙이다. 하나님은 잠자는 아담의 흙을 흔들어 깨웠다. 잠에서 일어난 소녀는 예수님을 봤을 것이다. “달리다쿰” 영어도 동일하다. “나는 영어를 못해!!”라고 스스로 좌절하면,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한국말도 하는데 왜 영어를 못하니!”라고 주님은 격려하며 손을 내민다.
영어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영어는 한글처럼 ‘그릇’이다. 한국어 그릇에서 영어 그릇으로 내 생각을 옮겨서 담는 것과 같다. ‘내 생각’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컨텐츠다. 이것을 배워서 마음에 내장하니, 영어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늘상 외우고 암송하는 산상수훈을 구름에 달 가듯이 영어로 암송하니, 마음이 또한 새롭다. 그래서, 나는 세종사이버대학교 국제학부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다.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내가 암송하는 성경을 4년동안 영어로도 암기해야겠다. 산상수훈은 무리에서 제자들을 분리해서 산위로 이동해 교육한 것이며, 창세기 1:2~3의 창조역사다. 무리의 혼돈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한다. 그래서, 교육은 빛이다.)
[Matthew 5:1~2]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마태복음 5: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