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벌은 성경에 딱 3번 나온다. 출애굽기 23:28, 신명기 7:20, 여호수아 24:12이다.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찌르아’(장수말벌)을 ‘왕벌’로 번역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말벌(hornet)’로 번역했고, 현대인의 성경은 ‘공포심’으로 의역했다. ‘장수말벌’이 가장 근접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졌고, 여리고성은 땅이 갈라지면서 무너졌고, 말벌떼가 갑자기 나타나 기관총을 쏘듯이 적군을 공격했다. 이것은 실제 사건이지, 왕벌조직의 모세를 상징하지 않는다.
[출23: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신7:2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또 왕벌을 그들 중에 보내어 그들의 남은 자와 너를 피하여 숨은 자를 멸하시리니
[수24: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나는 어린시절 ‘땅벌’에 물린 적이 있다. ‘땅벌’의 말만 들어도 무섭고, 두렵고, 오금이 저린다. 해병대 시절, 동료 한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부대가 비상이 걸렸다. 탈영병이 발생했다면서 수색작전을 펼쳤다. 알고보니, 부대 뒤쪽에서 대변을 보다가 말벌에 머리가 쏘였고, 그 자리에 쓰러져 있었다. 천만다행, 냄새나는 병사를 구출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말벌은 정말로 무섭다. 생김새도 꼭 ‘권총’처럼 생겼고, 옛날 시대에 말벌떼는 지금의 미사일과 흡사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벌’을 앞서 보내서 기습 특공대로 사용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말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 끔찍한 재앙이고, 말벌이 이스라엘의 원수를 공격하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다.
성경해석은 기초 국문법이 중요하다.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헤깔리면 안된다.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는 하나님이다. ‘네앞에’는 ‘모세앞에’ 또는 ‘이스라엘 민족앞에’다. 왕벌은 말벌이다. 왕벌은 결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은 쉬운 기초 국문법이다.
출애굽기 23장과 여호수아 24장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직접화법’ ‘1인칭 시점’으로 말한 것이다.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에서도 ‘내가’는 하나님이고, ‘너희앞에’는 이스라엘 민족앞에 이며, 왕벌은 왕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만히 있으면서 왕벌의 도움을 받아 전쟁의 승리를 얻었다. 하늘에서 우박이 쏟아지고, 말벌떼가 돕고, 생각지 않은 돌발변수가 생기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해줬다. 자연만물은 하나님의 전쟁 도구다. 천주교에서 제2정경으로 채택한 ‘솔로몬의 지혜’에는 ‘군대의 선봉으로 말벌을 보내시고’라고 정확히 해석됐다.
[지혜서 12:8] 그 악인들도 인간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관대하게 처리하시어 당신 군대의 선봉으로 말벌을 보내시고 조금씩 조금씩 멸망하게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릴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라고 공개적으로 물었다. 그때 예수님은 데나리온의 동전을 보이시면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다. 이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유명한 말씀을 했다.
성경해석은 자유하다. 그러나, 그 해석이 ‘누구의 형상이고, 누구의 글인지’ 분별해야한다. 왕벌비유를 ‘모세’와 ‘여호수아’로 해석하면서, 왕벌조직과 같은 ‘중앙집권적 왕권조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해석자의 자유인데, 그 해석이 과연 그리스도의 형상인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지, 분별해야한다. 중앙집권적 군림은 짐승의 권력이며,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서, 성만찬식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당신의 몸을 인류의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예수님은 섬기는 권력, 사랑의 권력, 낮아짐의 권력이다. 반면, 세상의 권력은 군림하는 권력, 중앙집권적 통치권력, 지배하는 권력, 착취해서 뺏는 권력이다. 자유를 침탈하는 억압의 권력이다.
[막10:42~45]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22:24~27]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왕벌비유는 확실히 ‘중앙집권적 독재’를 성경적으로 합법화한다. 그래서 무섭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어떤 인간도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구원주가 될 수 없다. 인간에게 영혼을 맡기는 자마다 인간의 영, 종의 영을 받게 된다.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메시야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의 창조주이며, 하나님께서 이 땅에 직접 내려오신 창조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조차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고, ‘의인’으로 새롭게 하셨다. 예수님은 단 한번도 왕벌이나, 말벌이나, 독재적 공포심으로 제자들을 억압하지 않았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는 왕벌조직이 아니고, 십자가 조직이다. “원수 로마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깊은 땅굴에서 벌들을 착취하는 여왕벌의 유혹에 절대 속지말자!!
‘왕벌 비유’는 성경에 전혀 없는 이야기다. 그것만 보더라도, 이단의 교리가 얼마나 잘못됐고, 위험하고, 전갈의 독침과 같은지, 새삼 절감한다. 우리는 ‘그 형상과 그 글’을 반드시 확인해서,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재발하지 않게 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은 정반대로 달랐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구원의 증표로 내세웠다. 곧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내놓은 마패는 ‘십자가’였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이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뜻이 아니다” 또는 “영적 구원만 이뤘다”고 해석하는데, 뱀의 해석이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뱀의 머리통”을 짓뭉개 버렸다. 나는 해병대 시절 뱀을 많이 잡아봤다. 뱀을 잡을 때는 막대기로 목을 콱 눌러서, 돌로 머리통을 깨뜨리면, 혓바닥이 “쭉” 터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옛뱀의 머리통을 짓뭉개버렸다. 곧 ‘죄’가 뱀의 머리통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마음에 받아드리면, 죄의 독이 정화되면서 ‘하나님의 의’로서 의인이 되는 것이다. 아멘!! 내 마음의 점령군,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은 어떻게 물리칠까? 십자가를 통해 몰아낼 수 있다. 비진리는 진리의 빛이 나타나면, 해달별이 어두워지듯 무색함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