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느 일반 직장 여성이라면 들고 다닐 법한 손거울, 화장품 같은 것들이 가방에 들어있지 않은 거냐고 친구가 타박하듯 말한 적이 있다. 지나가는 건물마다 거울처럼 훤히 비치는 유리면이 있는데 왜 그런 것들을 들고 다녀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나처럼 습관적으로 기웃대는 사람(그렇지 않으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의심스러운 사람이거나)이나 할 법한 행동이다. 나는 길을 걸을 때 목적지까지 직행하는 법이 없다. 외관이 조금만 눈에 띄어도, 상호명이나 판매하는 메뉴가 특이해도, 그냥 이유 없이 슬금슬금 가서 염탐하는 아주 의뭉스러운 습관이 있다.
이런 습관은 자주, 아무 곳에서나 발견된다. 서점에 가면 특히 그러한데, 특별히 내가 알지 못하는, 이를 테면 컴퓨터 공학, 인체학, 역학과 같은 전문 서적의 책도 의미 없이 슬쩍 열어 보고 짐짓 심각한 체 하고, 한 번 들어간 서점은 전체를 한바퀴 다 돌지 않고는 그냥 나오는 법이 없다. 분야 마다 베스트셀러가 뭔지, 괜찮아 보이는 신간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나서야 흡족한 마음이 든달까. 인터넷 서치(search)를 해도 마찬가지다. 네이버의 분야별 기사, 팟캐스트, 매거진, 블로그마다 재밌어 보이는 수 많은 페이지를 탐색하다 보면 모바일 창이 수십 개 넘어가는 건 금방이다.
팔랑이다 못해 펄럭이는 습자지 같은 귀, 눈에 들어온 건 꼭 잡고 마는 고집스러움, 쉬이 지치지 않는 체력 덕택에 나는 참 끊임없이 재미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나의 유별남을 사람들은 ‘잡스럽다’, ‘깊이 없다’ 같은 말 대신, 예쁜 말로 ‘다재다능하다’, ‘대화의 폭이 넓다’ 같은 말로 추켜세워 주곤 하는데 나로서는 싫지 않은, 솔직히 말하면, 가장 좋아하는 칭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질을 보며, 누군가는 이리 경쟁이 치열한 요즘같은 때에 경쟁력은 키우지 않고 이리기웃 저리기웃 한량 놀음하는 소리라 쓴 웃음을 보낼 지도 모르겠다. 전문가, 전문성이 강조되던 이전 같으면 맞는 말이니, 나도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있을 지 모르겠지만 요즘 난 그렇지가 않다. 기웃거리기는 단순히 이런저런 것들을 할 줄 아는 역량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탐색’ 과 ‘다양성’, ‘사고의 유연함’ 을 갖추는 차원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것들이 곧 경쟁력이 된 시대이다.
요즘처럼 인력 과잉, 스펙 과잉의 시대에는 나 말고도 경쟁력 있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하다. 실제로 내가 속한 컨설팅 업계는 예전만 하진 않지만 지금도 사람 구함이라는 공고만 올리면 아이비리그 출신의 소위 말하는 인재들이 레쥬메(resume,履歷書)를 보내오고 그들의 이력은 나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그들과 경영과 컨설팅 이라는 국한된 ‘전문성’의 영역에서 경쟁을 하려 들기 시작하면, 나만 손해일 것은 불보듯 뻔하다. 동시에 똑똑한 고객들 역시 전문성을 뛰어 넘는 다차원적인 업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단일 전문성만으로 생존하긴 더이상 힘들다는 말이다. 이러한 경향이 가장 잘 반영된 현상은 기업의 인사/채용 트렌드 변화인데,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회사는 현대카드이다.
현대카드 CEO 정태영 사장의 참신한 경영철학은 이미 너무도 유명하지만, 그가 현대카드에 취업하고 싶어하는 한 고등학생에게 회신한 편지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나의 말이 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모든 사물에 항상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하시면 좋습니다. 저는 ‘이 일은 원래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은 대학에 가셔서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세요. 여행도 큰 공부입니다. 음악에 빠져도 보고 그림에도 관심을 갖고 카메라의 원리도 익히세요. 농사의 이치도 궁금할 수 있고요 광고 회사의 일도 재미있습니다. IT에 화장품 회사의 원리가 도입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깊이 제대로 알거나 잘 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비교적 많은 분야에 얇은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워낙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데 덕분에 요즘 비즈니스의 추세라고 하는 복합성에 관해서는 큰 장점이 되고 있습니다. 광범위한 지식(?)은 지금은 금융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머리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다가 언젠가는 다른 지식들과 결합해서 귀중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 현대카드 CEO 정태영 사장
안타까운 건 기업의 CEO가 이렇게 대놓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있는 인재를 원한다고 하는데도, 아직도 많은 친구들이 ‘똑같은 전문성’ 키우기를 목적으로 직진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자격증을 따거나, 어학공부를 하는 것 같은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투자하는 시간에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취미생활을 갖는 것에 죄책감과 초조함을 느끼는 친구들이 많다. 분명 취업이 안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들을 이해하면서도, 소리쳐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당장 놀러나가라고. 기업에게 그런 지루한 느낌이 풀풀나는 레주메(resume,履歷書)는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시대적 요구도 있지만 기웃거림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했을 때 얻는 또 다른 가치는 스스로에 대해 탐색하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 어떻게 바뀔 지 모르는 시대에 미지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나의 면면들을 다차원적으로 열어두고 나의 장단점은 무엇이며, 어떠한 일에 흥미를 느끼는 지, 무엇을 할 때 삶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지를 파악한 후 나를 가장 잘 북돋을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게 낫다. 나의 경험 상 그러한 경우에 당연히 주변에 휘둘릴 확률도 낮고 만족감 역시 높다.
나는 오늘도 길을 걷다 대여섯번을 멈추었고 거리거리 마주하는 새로운 것들에 즐겁다. 이제 당신도 나와 함께 기웃거려 보지 않겠는가? 기웃거림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