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다. 꿈 때문에 구덩이에 빠진 요셉은 ‘꿈’을 피했을 것 같은데, 이후로 ‘꿈’을 전문했다. 꿈은 하나님과 대화채널이다. 나는 성경 때문에 청춘 30년이 사라졌다. 남들이 학벌을 추구할 때, 나는 진리로 믿은 종교에 빠져 30년을 살았고, 어느날 십자가의 의미를 배워서 새롭게 깨닫고, 30년의 어둠을 벗어났다. 이제, 나는, 날마다 성경을 읽는다. 주님은 무덤에서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하셨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렇게 나와있다.
[눅24:26~27]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24:44~4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성경을 읽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세상에서 들려오는 각종 뱀의 소리가 ‘뱀의 음성’으로 발각된다. 하와가 뱀의 말을 받아드린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소리’로 믿어져서 그런 것이다.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보이니 취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았으면, 뱀의 속임수가 들통난다. 그래서, 정수기 필터처럼 성경말씀과 성령의 깔대기를 마음에 가져야한다.
[창3:4~5]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은 여자가 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니, 여자는 영생한다. 선악과를 먹는 것과 상관없이 여자는 영생한다. 그런데, 뱀이 속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고 속였다. 뱀은 하와가 하나님의 딸이고,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고 속인 것인다. 모르면 속는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소금이다, 빛이다”라고 하셨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하셨지, “사랑하는 아들이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되라”는 자격요건을 두지 않고, “이다”는 사랑을 선포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는 축복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자격요건’의 도덕률이다. 가령,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이 내 구원에 큰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되겠으나,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이요, 예수님이다. 내가 만약 성경을 읽고 싶은 간절함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다. 밭에 어찌 농작물이 스스로 자랄 수 있으리요. 농부가 씨를 뿌려야만 좋은 농작물이 자란다. 마음속에 선한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뿌려서 그렇다. 하나님께서 신경쓰지 않으면, 밭은 잡초로 무성할 뿐이다. 내가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마태복음 25장에 신랑-신부 비유가 나오는데, 그것이 이단교회에서 악용된다. 바벨론에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제사그릇까지 약탈당했다. 그처럼, 성경말씀이 이단교회에서 ‘잘못’ 사용되니, 안타까운 일이다. 벨사살 왕이 성전기명에 ‘술’을 따라 마시다가 천벌을 받았다. 성경말씀을 결단코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랑-신부 비유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뜻하고, 성경본문에 따르면, “때”를 상징한다. “보라 신랑이로다”라는 음성으로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정한 때는 ‘신랑을 맞이하듯’ 긴장해서 맞아야한다. 졸면 안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말씀은 곧바로 실현된다. 제자들이 모두 졸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된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26:45)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시작했다. 이것이 신랑의 때다. 깨어있지 못하면 그것을 알지 못하니, 제자들은 도망쳤다. 반면, 여자 제자들은 깨어 있어서 십자가를 끝까지 따라갔고,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주님을 맨 처음 맞이했다. 다섯 처녀는 실제로 다섯 여인을 의미하며, 이 사건은 다섯 교회, 다섯 교단으로 확장된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만약, 다른 신랑을 찾는다면, 그는 어찌 되려나?
마가복음 10장에 부자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건을 마가가 기록한 목적은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맘몬신과 같은 재물을 조심하라”도 아니다. 만약,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에 복음의 초점이 맞춰진다면, 주님은 이 땅에 “사회복지”를 이루기 위해 오셨고, 거기에 가장 알맞은 정치제도는 공산주의일 것이다. 주님은 ‘사회복지’와 거리가 멀다. 주님은 “죄”를 박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즉, 부자청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 부자청년은 이후에 어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분명 십자가 사건을 접하고서 재전도의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듯 어렵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다고 한 ‘모든 부자들’속에 부자청년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충분히 부자도 구원받는다. 누가복음에서는 삭개오가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철저히 마가의 관점에서다. 바늘귀같은 사소한 관점이니, 듣고 무시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혹시 구원의 서광이 비춰짐에 있어서 유익하다면, 이것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도덕적 편견”을 모두 버려야한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가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런 부자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신다”가 핵심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막10:22에서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여 갔다. 그리고,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주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백배나 보상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막14:33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됐다고 하셨다. 이것은 부자가 갖고 있던 그 마음이다.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고백하시고, 운명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고, 새로운 아들들을 취하셨다. 또한, 죽임당한 그 아들을 살리시듯, 새롭게 얻은 아들들도 살리셨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듯 힘들고,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코끼리가 바늘귀에 들어가듯 힘들다. 사람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다. 곧,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십자가의 능력이다.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저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른 복음”에 대해 “저주”를 퍼부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7개의 화를 던지면서 저주하시듯,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변질시킨 ‘율법적 변증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갈1:7)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했다. (딤후2:8)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기억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외에 없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우리가 믿는 구석이 무엇인가? 그것을 그냥 들고서, 걸어가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거룩한 존재로서, 주님의 말씀을 믿으면, 직립보행을 하듯이 세상속으로 걸아갈 수 있다. 영생은 주님의 말씀으로 온다. 이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말이 많았다. 그때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했다. (요5:25)
이때는 언제인가?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는 그 때인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 영적으로 죽은 자든, 육적으로 죽은 자든, 죽었다면 들을 수 없다. 그런데, ‘들을 때’가 온다고 했다. 언제인가? 말씀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속에 묻혔을 때, 그 때다. 주님께서 무덤속에 묻히시니, 무덤속에 있는 자들이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우리는 무덤속에서 부활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무덤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자들은 ‘무덤’ 이후의 삶을 살아간다. 무덤속에 있는 자는 절대로 무덤 밖에 있는 자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무덤 밖에 계신 생명의 주께서 무덤안에 들어오시면, 그때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이 음성적 이신칭의(以信稱義)다.
바울은 이와 관련해 로마서 10장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십자가의 사랑’이고 인간에 세우는 모든 도덕률은 ‘자기 의’에 해당하며, 육신이 살아감에 유익할 뿐, 영생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단들은 초대교회때부터 극렬했다. 이는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을 택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자, 3장에서 뱀이 말씀의 변종을 만들었다. 말씀과 말씀의 변종은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주님은 “씨앗과 가라지”로 비유했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1에서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했다. 멸망하게할 이단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주의해야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멸망하게할 이단적 지식이 들어오면, 마귀의 가라지가 생각의 바람을 타고 불어온 것이다. 십자가로서 백신투여해야한다. 십자가가 마음에서 멀어지면, 뱀의 향락과 가까워짐이다. 서쪽과 멀어지면, 동쪽과 가깝다. 주님은 우리의 지성소로서 ‘영원한 서쪽’이다.
계시록 3:21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했다. 여기서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십자가로서 이기고,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셨다. 그렇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마다 그들에게 예비된 처소는 어디겠는가?
바울이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 주목하자. 예수님은 죽기까지 제자들을 사랑했고, 모든 백성과 인류를 사랑했다. 바울은 예수님을 증거하길,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2:11)
우리가 주를 시인하면 주도 우리를 시인하고,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주신 말씀이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눅12:8~9]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왜 성경을 읽는가? 나는 주안에서 내가 발견되기 위함이다. 내 삶속에서 주님이 발견되면, 주님안에서 내가 다시 발견된다. 주안에 내가, 내가 주안에 있다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생명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을 하나님께로 넉넉히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