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五餠二魚)는 표적이요, 실제 사건이다. 떡 5개로 어떻게 5천명을 먹였을까? 그 과정은 숨겨졌다. 그러나, 소년이 가져온 오병이어(五餠二魚)는 떡이요, 생선이다. 칠병이어(七餠二魚)도 떡이요, 생선이다. 5천명이 먹으려면,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빌립이 계산했다. 2천만원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모두 배부르게 먹었다고 했으니, 떡을 5개씩 먹었을 것이다. 오병이어가 5천명을 배부르게 먹이는 ‘능력’이 된 것이다. 만약, 오병이어(五餠二魚)는 그냥 ‘말씀’이었다고 하면, 5천명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예수님을 원망했을 것이다. 배가 고픈데, 어찌 떡이 아니고 말씀으로 배부를 수 있는가? 베드로가 예수님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던지니 물고기가 찢어지게 잡혔다. 말씀에 의지해서, 그냥 만족한 것이 아니다. 말씀은 현실을 움직인다. 오병이어로 축사하시면서, “나눠주라”고 하신 그 말씀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 그 과정이 무엇이든,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빛이 있으라”는 태초의 말씀으로 “빛”이 있었다. 그와같이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인 것이다.
오병이어 표적을 ‘비유’로만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의 육체부활도 ‘비유’로 해석한다. 초대교회부터 꾸준히 제기된 이단이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에게 주어지니, 곧바로 창세기 3장에서 뱀이 거짓복음을 뿌렸다. 마태복음 3장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하니,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부활사건은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신 구원의 능력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파괴하려는 이단들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십자가 외에는 구원이 없다. 오병이어 표적을 ‘비유’로 푸는 것은 결국 ‘육체부활’도 ‘영혼부활’이라고 증명하기 위한 전초다. 조심하자!! 마귀가 가룟유다에게 생각을 넣더니, 결국 사탄이 유다속에 직접 들어갔다. 처음에는 어둠의 지식이 하나씩 들어오는데, 자꾸 쌓이다보면 십자가를 없애버리고, 예수의 이름까지 부인하게 된다. 가룟유다는 결국 예수를 부인했고, 돈과 바꿨다. 예수로 시작한 성도들은 예수로 끝나야지, 다른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예수를 떠나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그것은 멸망의 증표다. 자색옷을 입은 부자가 장례식을 치르기 직전에 그렇게 살았다.
오병이어 표적의 구체적인 방법을 숨긴 이유는 표적의 목적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만약에, 오병이어 표적이 오천명을 먹이도록 나타난 새로운 ‘떡들’을 말하면, 사람들은 ‘새로운 떡들’만 보고, 예수님의 오병이어를 못 본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을 책망했다. 요한복음 6:26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꾸짖었다.
오병이어는 ‘표적’이었다. 요한복음 6:14에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다”라고 고백했다.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차고 넘친 표적을 말한다. 떡과 말씀은 상황에 따라 비유될 수도 있지만,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실제 떡인지, 영적인 떡인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 대해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떡’은 먹는 떡이다. 마귀가 먹는 떡을 말하니, 주님도 그 떡을 거부하면서 영적인 떡으로 ‘말씀’을 외쳤다. 먹는 떡과 영적 떡은 누구든지 구분할 수 있다.
마가복음 14:12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할까요”라고 묻자, 주님은 ‘큰 다락방이 있는 집’을 말씀하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다. 실제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했다. 실제 떡이 있고, 떡속에 ‘내 몸’이 뜻으로 들어간다. 만약, 주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그 떡은 ‘먹는 떡’에 불과하다. 배부르게 할 양식으로 끝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실제 떡이 ‘주님의 몸’이 된다.
요한복음은 실제사건과 표적의 설명으로 구성된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오병이어 표적도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의 모든 표적은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 땅에 나타냈고, 표적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내며, 증인된 우리는 주님을 이 땅에 나타내야한다.
첫 번째는 물이 포도주가 된 표적이다.
두 번째는 왕의 신하 아들을 살린 표적이다.
세 번째는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이다.
네 번째는 오병이어 표적이다.
다섯 번째는 소경된 자를 고친 표적이다.
여섯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표적이다.
일곱 번째는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이다.
실제 사건을 보이시고,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근원적인 뜻은 발견하지 못하고, 표적을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은 영적인 소경이고, 표적 사건을 ‘영적인 뜻’으로만 곡해하는 것도 ‘위험’하다. 육체도 있고, 영체도 있다. 두 가지를 모두 버리면 안된다. 예수님은 육체가 살아나 부활의 영체가 되셨다. 이로서 인간창조가 완성된 것이다. 나사로의 육체가 실제로 살아났듯이, 오병이오로 오천명을 먹인 것도 실제 사건이며,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신 것도 실제 사건이다. 예수님은 육체가 죽은 자 가운데서 신비하게 살아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