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했다. 이것은 비유다. 비유는 ‘실제 사물’을 통해서 그 뜻을 나타낸다. 주님이 계시고, 포도나무도 있다. 주님이 포도나무로 비유되면, 우리는 포도나무를 통해 주님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는 생명나무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생명 즉, 영생을 주는 나무임을 말한다. 그렇다고, “주님=생명나무”라는 등식을 적용하면 안된다. 포도나무 자체가 예수님이 아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니, 사람들이 혼동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 그렇다. ‘떡’이 있고, 주님은 ‘생명의 떡’이다. 그와 같이, 창세기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등장한다.
연극을 하면, 나무 두 그루가 있고, 사람도 두 사람이 나온다. 나무도 있고, 사람도 있다. 옛날에 부모가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 그 오동나무는 딸을 상징한다. 오동나무가 딸을 상징하니, 딸을 사랑하듯 오동나무를 돌본다. 그렇다고, 오동나무가 딸은 아니다. 단지, 상징이다. 딸이 시집을 가면 그 오동나무를 잘라서 장롱을 만들어서 혼수품으로 보낸다. 이제, 딸은 다른 집에 속하니, 오동나무가 새롭게 변형된다. 오동나무가 실제 딸이면, 오동나무로 장롱을 만들 수 없다. 오동나무가 있고, 딸도 있으며, 둘은 서로 연결된다. 그처럼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에덴동산에 있었고, 아담과 하와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연결된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에덴동산에 있는데, 그들의 삶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이단에서 “아담=생명나무”라고 풀고, “하와=선악나무”로 풀어도, 그 뜻이 어느 정도 해석된다. 상호 연결되어서 그렇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분명히 존재하고, 선악나무도 분명히 존재한다. 창세기 2장에 기록되었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안된다.
[창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고, 아담을 그곳에 두셨다. 에덴동산을 창설할 때, 이미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있었다.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돕는 베필로 하와를 주기 전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 하와가 에덴동산에 시집오기 전에 이미 ‘선악나무’가 있었다.
[창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최종판결을 보면, 생명나무는 따로 있었다.
[창3: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아담과 하와는 ‘선악의 열매’를 따먹었고, 하나님은 그것에 대해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판단하셨다. 그리고, 생명나무 열매를 더 이상 따먹지 못하도록 추방시켰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고, 다른 모든 열매를 따먹도록 했다. 생명나무 열매는 그들이 먹을 수 있었을까? 없었을까?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하나님은 “생명나무 열매 따먹지 못하도록 금지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생명나무 열매는 금지된 열매가 아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본래, 그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영생할 수 있었는데,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혔다. 생명나무와 선악나무가 이렇게 각각 존재한데, 그것을 생명나무는 아담이고, 선악나무는 하와라고만 풀면, 성경전체가 헝클어지고, 도덕책으로 전락한다. 조심해야한다. 도덕적 순결도 중요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는 영적 순결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아야한다.
이단교회, 통일교를 비롯해 대부분 이단들은 “예수님=생명나무”로 해석한다. 예수님=생명나무, 아담=생명나무, 타락한 아담=사망나무의 등식을 설정한 것인데, 예수님은 생명나무를 포함해서 ‘창조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고, 그곳에 각종 나무들을 만들고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도 만들었는데, 과연 하나님이 생명나무만 소유하셨는가? 하나님은 에덴동산 뿐만 아니라 우주를 소유하셨다. 히브리서는 우주의 상속자가 예수님이라고 선언했다. 생명나무 뿐만 아니라 천국전체가 예수님께 속했다. 천국의 낙원에는 생명나무가 많이 존재한다. 계시록이 그것을 증언한다.
[계22;2]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으니, 생명나무들이 있는 것이다.
[계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해당 구절이 “예수님=생명나무”의 일대일 등식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그런데, 22:1~2에 보면 강들이 흐르고, 생명나무들이 있다. 22:1에는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생명수의 강물이)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고 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강물이 흐르고, 강의 좌우로 생명나무들이 있다. 생명나무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지,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생명나무들로 강의 좌우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보좌앞에 강물이 흐르고, 그 좌우에 생명나무들이 있음은 ‘천국의 실제 모습’인데, 여기에 무슨 해석이 필요하랴!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실제 모습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생명나무가 각각 존재했듯, 에덴동산에도 강물이 흐르고, 생명나무와 선악나무도 각각 존재하며, 아담과 하와도 각각 존재한다. 본래 그들은 ‘에덴동산을 지키는 땅의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땅의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것이다. 아담이 생명나무가 아니고, 생명나무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들은 그것을 먹도록 허락받았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명나무로 해석했고, “선악과”를 “마귀의 유혹”(마4)으로 해석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만드셨고, 그것이 구원이다. 죄로 죽었으니, 그 죄를 무덤속에 묻고,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래서 ‘저주의 십자가’는 ‘부활의 십자가’로 다시 창조된다. 마귀 때문에 인류는 사망의 덫에 걸렸으나,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십자가의 나무’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라는 말씀을 남겼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나무”이다. 요한복음 1:4에서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요한복음 5:26에서도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하셨다.
[창2:21~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 갈비뼈와 살로 만든 것이 아니다. 아담의 갈비뼈를 하나 취하고, 그곳은 ‘살’로 대신 채웠다.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어서 아담에게 데려오니, 아담이 고백하길,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다”라고 했다. 곧, 아담의 뼈와 살로 여자가 만들어졌다.
이제, 주님은 묻는다. “너는 누구의 뼈와 살로 만들어졌는가?”
[막14:22~24]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은 한번 죽으면, 다시 죽지 않는다. 윤회는 없다. 이어서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했다. 두 번째 나타나실 때는 ‘죄있는 육체’로 오시지 않고,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한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은 다시 육체로 오지 않는다. 다시 육체로 오시면, 창조주께서 두 번 육체로 오신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땅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로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죄를 대속하는 구원주는 오직 예수님이고, 그가 유일한 구원주이다. 다른 그리스도는 많다. 곧 정치적 그리스도, 경제적 그리스도, 세속적 그리스도들이다. 그들은 ‘대속적 그리스도’를 방해하는 인물들이니, 극히 조심해야한다. 초대교회에서는 ‘대속적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제외한 ‘그리스도들’을 모두 ‘적그리스도’로 판단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묻는다. “너는 누구의 뼈와 살로 만들어졌는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