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9:13에서 주님은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다. 주님은 자칭 의인을 찾지 않고, 애통하는 죄인을 애타게 찾으신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곧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을 깨닫고 그의 이름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는 로마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증거하듯,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했다. 한 사람은 자기 의로움을 자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죄를 애통했다. 누가 의인인가? 죄를 자복한 자가 ‘의롭다’고 여겨졌다. 죄를 자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고, 그 긍휼이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함으로 죄가 용서된다. 죄인된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복했다. 이때 예수님이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고 말씀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애통을 제물로 받으신 것이다.
네 명의 친구가 들 것에 싣고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복음서마다 예수님께 데려온 과정이 약간씩 다르지만,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그 제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죄사함은 ‘대제사장’으로서 주님의 권능이며, 제자들은 모두 ‘제사장’의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제사장은 그 임기가 살아있는 동안이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여전히 대제사장이다. 그래서, 이 땅에 다른 이름의 구원주가 없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애통하는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그 죄는 용서받는다. 다른 이름으로 나아가면, 십자가의 권능이 없다. 죄인 세리가 의롭게 된 것은 ‘애통하는 심령’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고 한 그 말씀으로 의롭게 된 것이다.
탕자 비유도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 넘친다. 이는 탕자가 곧 ‘제물’이 됨으로 그 집안이 잔치가 된 것이다. 탕자에게 일어난 슬픈 비극이 희극으로 변화될 수 있는 변곡점은 ‘아버지’에 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자애로운 주님은 대제사장이 되어서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함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애통함으로 피흘림의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으니, 주님께 돌아가는 모든 영혼은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주일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죄를 씻는 거룩한 날이다. 집에 있으면 뭐하나? 하나님께 가서, 올해의 소원을 간구하자!! 그가 성취할 것이다. 예물은 애통하는 심령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아다. 길을 잃었음을 진실로 고백하면, 주님의 길이 나타날 것이다.
동방박사가 세가지 예물을 갖고 예수님께 경배한 것, 이후에 유아 대학살이 일어난 것, 모두 “죄사함의 권능”으로서 대제사장의 대속 사건으로 예표한다. 예수님은 아기의 모습으로 동방박사와 그 예물을 제물로 받으셨다. 주님은 이 땅에 태어나실 때부터 이미 ‘어린양’으로서 오셨고, 멜기세덱의 반차로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셨다. 그 권능은 영원하니, 죄인된 인간은 그로 말미암아 평안이 약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