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를 정죄하거나, ‘빌라도’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은밀히 숨기는 것에 불과하다. 요한복음 13장에서 마귀는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대한 것과 같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반대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사탄이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마귀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유다의 마음에 넣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반대함으로 예수님과 함께 권력을 누리길 원했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서 돈과 권력을 얻길 원했다. 모두, 세상적인 것을 바람이다.
사탄의 생각에 물든 베드로를 데리고 헤르몬산에 올라서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듯, 이제 마귀의 생각에 물든 가룟유다를 위해서 주님은 기꺼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그의 발을 씻기시고, 떡까지 주셨으나, 결국 마귀에게 물든 그 생각이 회개에 이르지 못하였다. 베드로는 회개함으로 용서받은 죄인이고,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못한 죄인이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다. 우리는 예수님을 팔거나, 부인하거나, 모두 동일한 죄성을 소유했다.
베드로는 용서받은 죄인이고, 가룟유다는 용서받을 죄인이었으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살했을 뿐이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밖에 없다. 용서받은 죄인과 용서받을 죄인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7:14에서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죄 아래 팔렸으나, 주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또한 죄 아래 팔림을 당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시편 105편 7절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이미 목욕한 자”는 세례를 상징하는 의미다. 골로새서 2:12에서 바울은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했다. 세례를 받은 것은 십자가의 대속과 무덤에 묻힘과 부활을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면, 성찬에 참예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새 생명을 믿음으로 얻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주께서 우리와 연합해서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무덤에서 믿음으로 부활한다. 아멘!!
주님은 세족식을 마치시고,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했다. 이후 주님은 13:34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했다. 누구의 죄가 보이거든 그 죄를 씻어주면서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곧 사랑이며, 형제가 잘못을 범하면 은밀하게 가서 타이르고, 또한 대신 눈물로 참회하면서 스스로 성령으로 깨닫도록 하는 것이 ‘서로 사랑’의 모범이다. 주님은 사룟유다를 그렇게 사랑하셨고, 가룟유다의 ‘악한 생각’까지 선하게 당하심으로 사랑하였다. 이것이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이다. 주님은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셨다. 칼을 칼집에 꽂으심으로 세상을 사랑으로 이기셨다. ‘서로 사랑’의 고귀한 가치가 가본주의 시대에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