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는 성경구절을 읽었다. 열왕기상 17장 7절 말씀이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는 이 성경말씀이 내게 흘러왔다. “그렇구나! 말랐구나! 아멘!!” 이제, 나는, 주님께 물었다. “왜! 말랐죠? 선지가가 있는데?” 그때 내 마음에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선지자가 있어서 말랐느니라.” 그리고, 그릿 시냇물이 요단강물로, 홍해로, 홍수심판으로, 창조 3일로 확장되었다. 그릿 시냇물이 마른 사건은 자연현상이 아니고,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묵시다. 곧, 새로운 가나안을 예표한다. 이렇게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성경은 역사책으로 갇힌다. 성경은 구원과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명력은 지금 살아있는 모든 사람에 대함이다. 그릿 시냇물이 마르듯, 내 마음속 탐욕의 냇물이 말랐는가? 그때, 요단강을 건너리라.
나의 주장은 성경적 근거가 있다. 16장 29절과 17장 1절 사이에 갑자기 여리고성을 건축한 벧엘 사람 히엘이 등장하고,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첨가됐다. 그리고, 엘리야가 출현한다. 이는 엘리야가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그 시대에 새로운 가나안을 명령한 것이다. 여호수아는 누구인가? 모세의 뒤를 이어서 요단강물을 멈추게 하고, 해와 달을 멈추게 한 인물이다. 그처럼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게 하고, 그릿 시냇물이 마르게 했다. 성경기자는 그릿 시냇가를 표현할 때도, ‘요단 앞 그릿 시냇가’라고 적었다. 이는 요단강과 연결한 성경적 사건을 암시한다. 요단강물이 멈추고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듯, 그릿 시냇물이 마르고 엘리야는 시돈땅에 들어간다. 여호수아와 엘리야가 출발한 장소는 모두 요단강 동편으로 같다.
열왕기상 17장에서 핵심 키워드는 무엇일까? 시돈과 우상과 까마귀다. 모두 같은 맥락이다. 이방민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니, 하나님은 그곳을 떠나 새로운 가나안을 찾아간다. 그곳이 바로 ‘시돈’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설이며, 역공이다. 시돈 공주가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가져오니,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시돈의 사르밧 과부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렇다면, 까마귀들이 누구인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아합왕과 반대하고, 엘리야 편에 선 이방민족이다. 까마귀들이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가져왔다는 것은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까마귀들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엘리야 편이다. 아합이 바알에게 예배할 때, 엘리야는 까마귀들과 함께 떡과 고기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성경을 깊게 읽으면, 사건의 재현이다. 모든 사건에는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예표된다.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었을 때,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성령에 이끌려서 유대광야로 내몰려 40일 동안 숨어서 시험을 받았다. 엘리야의 사역이 그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엘리야처럼,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떠나서 이방의 갈릴리로 가서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과 야고보와 마태 등에게 말씀을 전했다.
사르밧 과부를 만난 엘리야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다. 그때 사르밧 과부가 말하길,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 죽으리라”고 했다. 오!! 마지막 식사!! 현실고는 참담하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십자가 사건을 함축한다. 얼마후 그 아들이 죽었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니,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고 했다. 나뭇가지 둘, 즉 십자가에 의해 죽음이 결정된 그 아들이 실제로 죽었고, 다시 살아났다. 곧, 예수님의 사역이 그곳에 복선으로 깔려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사르밧 과부는 고백하길,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고 했다. 주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우리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는가? 나의 죄? 누구의 죄? 나의 죄를 보는 자마다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구원을 얻는다.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살아나듯 주님께서 살아났으니, 믿는 자도 죄에서 해방되어 날마다 살아난다.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거짓 선지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때,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라고 그의 사환이 증거했다. 그 증거의 말이 무엇인가? 작은 구름은 하늘의 권능이며, 인자의 나타남이다. 다니엘서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다. 엘리야 시대에도 주님은 손바닥같은 작은 구름으로 모습을 잠시 보이시고, 이후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면서 하늘이 캄캄하게 했다. 주의 임재다. 그대에게 손바닥만한 희망의 뭉게구름이 보이는가? 주님의 약속이 나타남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곧, 성령의 동풍이 불어오리라.
엘리야는 분명히 마음이 꺽였다.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처럼 마음이 낙망했다. 악녀 이세벨 때문에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은 성경적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낙심하면,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람이 약할 때 주님은 강하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은 창조된다. 왜!! 19:8에서 “사십주 사십야”라고 기록했을까? 곧 ‘모세의 율법’으로 초기화된다. 그때, 엘리야는 굴에 들어가서 머물렀다. 곧, 예수님의 무덤을 예표한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모세의 율법이 종결되고, 새롭게 구원이 창조된다.
19:13에서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했다. 굴속에 있던 엘리야를 향해 미세한 소리가 있었다. 곧, “엘리야야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이다. “나사로야 나오라”와 같다. 성육신의 주님이 나사로를 부를 때, 이미 엘리야를 향해서도 불렀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금, “창훈아!”라고 부르면, 나는 주님의 말씀으로 무덤이 사라진다. 주님의 말씀은 곧 빛이니, 어둠은 물러가고, 홍해는 갈라지며, 물속에서 뭍의 길이 드러난다. 오병이어 표적처럼 모든 배고픔이 배부름으로 변화된다. 엘리야만큼 예수님의 사역을 완벽히 증거한 선지자가 없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의 노정을 그대로 증거한다. ‘십자가’는 구원이요, 사랑이며, 생명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짐이며, 주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낳으신 것이다. 십자가의 해산이 없었다면 어찌 구원이 있으리요.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했다.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명’이라고 말씀한 것은 ‘이스라엘’은 표면적 이스라엘이고, ‘칠천명’은 참 이스라엘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는 자들이 참 이스라엘 백성이며, 참 그리스도인이다.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