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좋은가?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는 신앙고백이다. 문재인 대통령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함과 직함이 붙어있다. 인류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다. 그렇다면, 그 지식이 무슨 효과가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은 대통령이다”는 것을 함축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내게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나와 대통령’의 직접 관계가 있어야한다. 대통령이 내게 “청와대에 와라”고 했다면, 그때 문재인 대통령은 내게 유익이 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음은 “예수님의 약속”과 관련된다. 예수님은 내게 무슨 일을 해주실 수 있을까?
예수님은 곧 ‘십자가와 부활’이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중심에 놓는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가장 아름다운 행위가 곧 십자가로 완성됐다.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실제 죽음이듯, 무덤에서 부활도 실제 육신의 부활이다. 초대교회 당시 500명의 목격자가 그것을 증언하니, 성경적 진리다. 만약, 예수님의 육체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도 없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은 ‘육체부활’이다. (이와 관련한 입증논리는 ‘예수를 아는 지식’을 참고하면 좋다.)
자!! 성경적 진실을 말하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주님은 분명 단번에 홀로 십자가에서 어린양의 대속제사를 드리셨는데, ‘대표성’에는 ‘대신함’이 들어있다. 마치, 축구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숭하면, 나도 이긴 듯 기분이 덩실덩실 춤추는 것과 같다. 나의 예수님이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매우 중요해진다. 나와 무관한 예수님일 경우, 십자가도 역시 나와 무관하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마리아야! 베드로야! 도마야! 바울아!”라고 각각 불렀다. 그들의 삶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각각 출석부의 이름을 부르듯 불러서 무덤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셨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나사로가 나왔다. 각자도생이다. 나사로를 부르기 전에, 주님은 먼저 마르다를 불러냈고, 다음에는 마리아를 불러냈다. 그리고,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낸 것이다. 어디에 있든지, 주님은 반드시 불러낸다. 나사로를 살려낼 때, 부름을 받은 사람은 오직 3명이다.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이다. 그날, 살아난 사람은 그래서 3명이다. 살아난 나사로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니, 새롭게 주님을 영접한 자들은 또한 주님께서 새롭게 부르신다. 이것이 각자도생의 깊은 비밀이다. 주님은 출석부로 학생 이름을 부르듯 각각 불러서 구원을 주신다.
그래서, 교회에 가는 것은 주님과 일대일로 교제하기 위함이다. 이 개념이 없으면, 교회에 다니는 목적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교회는 옛날 구약교회의 제사와 같아서, 각각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아벨이 아벨의 제단으로, 가인이 가인의 제단으로 각각 쌓듯이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과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 그처럼, 하나님은 교회에 오는 모든 성도들의 예배를 각각 받기도 하시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깊은 영성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이 열납이다. 형식적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간다면 주님과 교제가 없으니 ‘교회 예배’를 참석한 것이지, 주님과 교제한 것은 아니다. 예배는 주님과 일대일 교제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해, 또한 나를 위해 죄값을 지불하셨다.
복음서를 깊게 탐독하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 주님은 한 명의 주님이다. 요한복음 20:22에서 주님은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때 성령은 집단으로 임하지 않고, 제자들의 각각에게 임한다. 이날 도마는 없었다. 일주일 후에 도마는 주님을 다시 만났고, 그때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120명의 제자 공동체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 사도행전 2:3에 증언하길,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했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각각 임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일대일 관계적 구원이다. 마태복음 25:41에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는데, 각각 구원한다는 의미다. 주님이 베다니 마을에 도착했을 때, 먼저 마르다를 불렀고, 이어 마리아를 불렀고, 그리고 나사로를 불렀다. 부름을 받았을 때, 그때가 구원의 때다. 그래서, 성경은 증언한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마24:44) 성경적 구원은 주님과 나의 각자도생이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지금,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