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실제로 무덤에 묻히셨고, 실제로 육신이 죽은 곳에서 살아나셨다. 이 모든 사건은 주님께 실제 사건이며, 우리에게 의미로 전달될 때는 ‘비유와 상징’의 경로다. TV에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건과 주님의 부활이 다른 것은 ‘비유와 상징’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비유와 상징’으로서 직접 의미가 있다. 비유와 상징으로 주님과 연합하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고, 묻혔고, 살아난다. 이것이 비유와 상징의 능력이다.
가령, 성만찬식에서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빵을 조각으로 쪼개시듯 주님은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포도주처럼 붉은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셨다. 떡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주님의 살과 피로 믿으면, 주님의 십자가 영성이 몸에 임한다. 이것이 비유와 상징의 능력이다. 이에, 십자가를 의미하는 다양한 비유들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한다.
◆ 대속물로서 십자가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 사건을 ‘대속물’로서 말씀했다. 마태복음 20:28, 마가복음 10:45이다. 바울도 같은 개념을 사용했다. 디모데전서 2:6이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딤전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비유의 핵심은 ‘틀’에 있다. 주님께서 떡을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다”고 하시면, 그때부터 그 떡은 ‘몸’이다. 여기서는 ‘말씀’의 비유가 사라진다. “떡은 몸이다”고 했으니, 떡을 먹으면, 주님의 몸이 들어오는 것이며, 떡을 쪼갠 행위는 주님의 죽음을 암시한다. 주님의 몸, 주님의 생명이 떡을 먹은 제자들에게 옮겨진다. 비유는 그 틀을 벗어나면, 맛이 변질된다. 그래서, 틀을 유지하면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대속물과 화목제물은 전혀 다르다. 비슷하게 보이지만, 개념이 다르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유하고 있지만, 대속물과 화목제물은 단어도 다르고, 자체적 의미도 다르다. 사과와 배가 다르듯, 다르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가 다르듯 다르다. 주님이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셨을 때, 우리는 포도나무의 덩굴과 포도송이를 연상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음미해야한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갑자기 ‘감나무 홍시’가 끼어들면 비유는 틀어진다. 비유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기준이다.
‘주님의 목숨’이 ‘대속물’로 주어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목숨값’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지불되었다. 대속물(代贖物)은 대신 속량(贖良)한다는 뜻이다. 속(贖)은 값을 치렀다는 뜻이다. 구속(救贖)도 같은 뜻이다. ‘구원하기 위해 속량한다’가 구속(救贖)이다. 반면, 구속(拘束)은 붙잡다는 뜻이다.
값은 무슨 값인가? 곧, 죄가 빚의 채무로 비유되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만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나온다. 임금이 빚진 종을 불쌍히 여겨서 빚을 탕감했다. 바로 그 ‘빚’을 말한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죄의 빚’을 탕감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목숨을 버리고, 대신 모든 사람을 사셨다. 목숨과 목숨의 맞교환이다.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주고, ‘사람의 아들’을 취하셨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만 놓고 비유한 것이다.
십자가, 즉 영원한 사망에 갇힌 자는 우리다. 주님이 그 사망에 들어갔으니, 대신에 우리는 그곳에서 풀려난 것이다. 이 비유의 구체적인 사례가 ‘바라바’다. 유월절 명절 특사에서 죄없는 주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죄있는 바라바는 풀려나서 자유를 얻었다. 본래, 바라바가 죽었어야 하는 십자가에 주님이 죽었으니, 바라바는 살아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면서 바라바를 살렸으니, 바라바는 ‘죄인’을 대표한다. 그렇다면, 바라바는 누구의 것인가? 십자가에서 죽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목숨을 주고 바라바의 목숨을 샀다. 그래서, 주님이 바라바의 구원주다. 이 비유는 요한복음 15:13과도 연결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15:13)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곧, 베드로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그래서, 베드로의 목숨은 주님의 것이다. 내가 1천만원을 주고 차를 샀다면, 1천만원은 사라지고, 대신 차가 생긴다. 그처럼, 하나님은 주님의 목숨을 버리고, 베드로를 구매했다. 구속(救贖)은 구매(購買)와 같다. 하나님이 아들의 목숨으로 베드로를 샀으니,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의 것이다. 구원받은 백성은 그래서 주님의 것이다. 곧,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할 운명이다. 주님이 진정 ‘나의 대속물’이 되셨다면, 이제 나는 누구의 것인가?
요셉이 은 20에 팔렸다. 이집트에서 보디발이 그 요셉을 샀다. 그때 지불한 값이 속전(贖錢)이다. 대속물(代贖物)은 속전(贖錢)을 말한다. 보디발이 요셉을 샀으니, 이제 요셉의 주인은 보디발이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을 위해 충성했다. 충실한 청지기가 되어서,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도 ‘보디발의 뜻대로’ 행했다. 주님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다면,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한다.
요셉이 그 형제들을 시험하면서, 베냐민을 옥에 가두려고 하자, 그때 유다가 말했다. “이제 제가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의 참회가 곧 몸을 대신하는 속전(贖錢)이다. 창세기에서 유다는 참회함으로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고, 주님은 실제로 몸을 십자가에 버리심으로, 우리의 죽을 생명을 살리셨다. 유다 대신에 베냐민이 풀리듯, 주님 대신에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이다.
주님은 묻는다. “나는 너의 친구다. 이제, 너는 나의 친구가 맞냐?”라고. 주님께 친구는 목숨까지 바치는 존재다. 진정, 나는, 우리는, 주님의 친구인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바치고 있는가? 이상이 대속물로서 ‘십자가’의 비유해석이다. (대속물 비유에서 화목제물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비유의 틀’이 다르기때문이다.)
<추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속물 비유’는 ‘너희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시면서, ‘대속물’ 말씀이 나왔다. 맥락에 따라 그 뜻을 추적하면,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길 원했다. 곧, 권력의지다. 주님의 제자 공동체는 ‘권력’에 갇혔고, 주님의 민족 공동체도 ‘권력’에 예속됐다. 이것은 짐승의 권력이다. 빌라도와 가야바와 헤롯왕은 큰 권력에 갇힌 죄인들이고, 제자 공동체는 작은 권력에 갇힌 죄인들인데, 모두 권력에 갇혔다. 그래서 주님은 성만찬에서 ‘세족식’을 하시면서, 그들에게 “대속물”로서 비유를 하셨다. 주님은 권력 아래 팔려서 넘겨지고, 대신에 제자들은 성령의 품으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배하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권력의지는 마귀의 속성이니,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한다. 주님의 권력은 낮아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