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세, 입술과 항문이 같은 본질임을 깨닫는다. 입술은 말의 출구다. 먹는 음식으로 입술과 혀는 입구인데, 뱉는 말로는 혀와 입술이 출구다. 속에 있던 말이 생각을 통해 소화되어, 입술에서 배출된다. 쌓은 악에서 악이 나오는 것은 먹은 밥에서 배설물이 나옴과 같다.
싼다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일반이다. 둘의 차이는 ‘뒷처리’에 있다. 동물은 항문을 닦을 줄 모른다. 반면, 사람은 더러움을 깨끗하게 할 줄 안다. 그와 같이, 사람은 입술의 항문도 깨끗하게 할 줄 알아야한다. 각종 더러운 욕설을 뱉고서, 그 입술이 어찌 깨끗할 수 있을까? 악을 악하다고 할 때, 그 욕설이 입술에서 나갔으니, 욕설로서 자신의 입술이 더러워졌다. 그렇다면, 자신의 입술을 깨끗하게 해야한다. 이것이 회개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했다. 회개는 곧 사람답게 살라는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면, 동물처럼 배설한다. 점점점 성장하면서 자신의 배설물을 자신이 닦을 줄 안다. 어떤 짐승은 지각이 있어서 배설물을 주인이 정한 자리에서 배설한다. 동물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입술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회개다. 회개하면, 곧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배설하고, 항문을 정결하게 한다. 그와같이 입술의 배설물은 날마다 나온다. 스스로 양심과 성령에 따라 거리낌이 없도록 반성과 성찰과 기도로서 입술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한다.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 입술의 죄악을 토설했다. 죄악을 시인하는 것이 곧 ‘회개’요, 그때 하나님은 숯불로서 입술의 죄악을 제거하신다. 회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용서를 받는다.
입술이 ‘말의 열매’가 될 수도 있다. 악을 배출하면 더러움이 묻지만, 정결한 언어로서 하나님께 찬송하면 ‘입술의 제사’가 된다. 히브리서 13:15에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입에서 “남탓”과 “비판”과 “세상탓”과 “부정적 생각”이 나오거든, 배설물이 쏟아지는 것을 알아야한다. 배설물이 쏟아졌으니, 이제 어쩌랴. 더려워진 입술을 깨끗하게 해야한다. 배설물이 쏟아짐은 속에 그러한 것이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고백해야한다. “세상이 악하다”는 말이 나왔다면, 그것은 “세상을 악하게 보는 내가 악하다”는 뜻과 같다. 자기로부터 출발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나의 회개를 시작했다.
아담은 아내탓, 하와는 뱀탓했다. 그래서,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 영적 실업자가 된 것이다. 남탓하면, 안된다. 상대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누군가의 죄가 보인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들보원리’다. 주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고 말씀했다. 형제에게 티가 보이면, 그것은 자신에게 ‘같은 종류의 들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악한 세대를 보고, 그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울부짖었다. 이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히브리서 10:20에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의 천국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다.
또한 에베소서 2:14에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했다. 주님은 십자가로서 원수된 담벼락을 허물었다. 과연, 누가 그 십자가로 현재의 모든 원수된 것들을 소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