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는 ‘씨뿌리는 비유’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했다. 마가복음 4:13에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고 했다. 씨뿌리는 비유를 모르면, 다른 모든 비유도 안다고 해도 모른다.
이 비유는 ‘4가지 밭비유’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복음서의 비유는 모두 예수님이 만들었다. 비유는 그 틀을 자세히 관찰해서, 틀안에서 파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씨뿌리는 비유의 깊은 비밀은 무엇인가? 옥토밭이 되라는 것일까? 씨뿌리는 비유에서 “옥토밭이 되라”는 구절은 없다.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때”에 있다. 보통 농부들은 자기 밭에만 뿌리는데, 주님의 비유속에 등장하는 농부는 그냥 마구 뿌린다.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새들이 쪼아 먹을 수도 있을텐데, 길가에도 뿌리고, 가시밭에도 뿌리고, 돌짝밭에도 뿌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고 말씀의 씨앗을 뿌리신다. 하나님은 죄악의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뿌려서, 십자가에서 버리셨다. 이것이 ‘씨뿌리는 비유’의 포인트다.
가령, 마가복음 4장 앞부분에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는 말씀이 나온다. 그 말씀도 ‘씨앗’과 같다. 주님은 말씀의 씨앗을 뿌릴 때, 혈육의 가족과 신앙의 가족들이 모두 듣는 곳에서 ‘씨앗’을 뿌리셨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만약, “혈통적 가족은 신앙의 가족이 아니다”고 판단하면, 어리석은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주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이 혈통적 가족들에게 뿌려져서, 훗날 결실을 이뤘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 사건에서 끝까지 함께 했다.
새들이 먹어버릴 길가밭 같은 사람은 죄악에 물든 세상 사람일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가시덤불이 넘치는 사람은 돈밖에 모르는 사람일 것인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돌짝밭같은 사람은 복음을 결단코 받아드릴 수 없는 어둠의 사람인데, 복음을 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주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밭, 가리지 말고 씨앗을 뿌리라”고 했다.
씨앗을 뿌리면, 씨앗이 밭을 결정한다. 사람은 어떤 밭이 옥토밭인지 절대로 모른다. 씨가 알고, 스스로 뿌리를 내려서 결실한다. 어떤 밭은 30년만에 결실할 수도 있고, 어떤 밭은 3개월만에 결실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3년만에 결실해서, 주님의 복음을 담대히 외치는 사도로 거듭났다. 죄악이 가시밭으로, 돌짝밭으로, 길가밭으로 가득찬 사람이어도, 성령의 불이 임하면, 모든 죄악을 불사를 것이다. 최고의 옥토밭이 되어서 결실할 것이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다면, 누구든지 성령의 불을 받고서 마음밭을 기경할 수 있다. 사람은 못한다. 성령은 스스로 하신다. 마가복음 4장 씨뿌리는 비유를 다시 읽어보자. (마태복음에는 13장에 있다.)
** 물론, ‘말씀을 듣고 받아’에 방점을 두고, 옥토밭은 말씀을 듣고 받아드리는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다. 단지, 씨뿌리는 비유의 전체 틀을 말한 것이다. 복음을 외쳐야할 감동이 왔는데, 하지 않았다면, 그 생명에 대한 핏값은 복음을 외치지 않는 자에게 돌아간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을 외쳐야한다. 씨앗을 뿌리면, 그 씨앗이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기경하고, 생명을 새롭게 빚는다. 전도는 결국 성령께서 말씀으로 행하신다.
주님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도 ‘용서의 씨앗’을 뿌리셨다.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 우측강도에게도 복음을 뿌렸다. 살아나서도 제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뿌렸다. 빈부귀천없이 거지 바디매오에게, 부자청년에게, 복음을 뿌렸다. 그것을 기억하자!! 낭만닥터 김사부2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처럼, 목자는 양을 차별하지 않고, 농부도 밭을 차별하지 않는다. 양도, 밭도, 비유의 실상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체여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비유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