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가복음 8장 베드로의 고백
빌립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주님은 십자가 사건을 선포하자, 베드로가 강력히 반대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데, 왜 믿는가? 믿는 목적이 과연 무엇인가?
마가복음의 독특한 편집은 사건의 연결성이다. 히브리인들의 고유화법이기도 하다. 우리도 비유를 들어서 말할 때, 비슷한 사건 2개를 말하고서 덮는 경우가 있다. 듣는 청중이 그것을 스스로 파악하도록 여유를 두는 것이다. 마가복음의 편집이 그렇게 되어 있다. 베드로의 고백사건 앞에는 벳새다 맹인 치료사건이 있다. 벳새다는 베드로의 고향이다. 벳새다 맹인은 첫 번째 눈을 떴는데, 사람들이 보였고, 다시 눈을 뜨자 모든 것이 보였다.
베드로도 첫 번째 주님에 대해 눈을 떴을 때는 ‘사람들을 위한’ 권력의 그리스도가 보였다. 왕의 그리스도이다. 헤르몬산에 올라가서 변모사건을 경험한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속의 그리스도를 서서히 알게 되는데,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변화되었다. 주님을 믿는 근본 목적은 무엇이며,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은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8:34)
#2 창세기 3장 뱀의 유혹 사건
이 세상에서 공짜는 없다. 설령 무료로 나눠주는 제품에도 어떤 값이 지불된다. 무료 시음회는 시음하는 사람의 시간이 지불되며, 공짜는 없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은 에덴동산과 배우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나중에 박탈됐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은 ‘잠정적 거주’였을 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소유권을 영원히 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 소유권이 박탈되었을까? 하나님과 계약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선악지식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 특약사항을 우습게 여겼다.
창세기 3:6에서 뱀의 설명을 들은 하와에게 이상한 효과가 생겼다. 즉, 선악과를 따먹고 싶어지도록 생각이 담대해졌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다. 하와가 봤던 그 나무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뱀의 유혹을 받고서 그것을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해서 따먹었다.
베드로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권력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것이 바로 뱀의 관점에 본 ‘군림하는 그리스도’요, ‘사람들의 그리스도’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것인가? 뱀이 보기에 먹기 좋은 열매인가? 분별해야한다.
#3 사무엘하 11장 밧세바 불륜사건
밧세바는 다윗에게 ‘딸’같은 존재다. 우리아의 아내로서 밧세바가 아니고, 다윗과도 잘 아는 친한 사이이며, 나이차이가 상당히 많다. 삼하 11장 2절에 보면, 저녁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 마음의 정욕은 심히 아름다워 보이면, 그렇게 움직인다. 그리고, 그날 술을 마시다가 동침했고, 밧세바가 임신했다.
남편 우리아를 불러서 임신 사실을 적당히 덮으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요압을 통해 적의 칼에 우리아를 죽게 했고, 그 사건이 다윗가문의 칼이 되었다. ‘밧세바와 불륜’이 결국 그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 압살롬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알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남편의 직장을 잃게 하고, 존속살해사건을 일으키는 범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다. 칼은 무서운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 심히 아름답게 보이거든, 그 일을 행한 이후까지 내다보는 혜안(慧眼)을 가져야한다. ‘불륜-임신-살해-가문파탄’의 연쇄반응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4 출애굽기 3장 떨기나무 사건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서 모세는 큰 광경을 목격한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 것이다. 즉, 하잖은 떨기나무가 계속 존재하면서 불꽃이 있는 것이다. 자연현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이다. 이것은 ‘주님의 육체부활’을 예표한다. 육체가 실제로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니, 제자들은 신앙이 뒤집어진 것이다. 모세도 같은 것을 목격했다. 자연을 초월한 그 사건을 목격하고,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실제로 들렸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무엇이 보이는가? 모세가 만약, 떨기나무가 재가 되지 않고 불에 타는 자연현상만 관찰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신비한 떨기나무’에 대한 목격담이나 떠들다가 인생이 끝났을 것이다. 우연한 사건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고, 모세5경을 쓴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뭔가를 봤고, 그것을 더 가까이 가서 관찰하려고 접근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신발을 벗어라”는 것은 “하나님께 주권을 넘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라”는 의미다. 신발은 곧 ‘주권’이다. 장인 이드로의 사위로 그만 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의미다.
#5 요한복음 15장 진리의 성령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사람들이 따르는 종교지도자는 반드시 ‘진리의 성령’ 시험을 받게 된다. 마귀는 “네가 진리의 성령이다”라고 유혹한다. 그것을 부인해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 만약에, 누구든지, “내가 진리의 성령이다”라고 하면, 그 즉시 마귀의 밥이 된다.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천법이다. 진리의 성령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십자가를 증거한다.
부활의 주님께서 맨 처음 했던 일이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였다. 오순절 다락방 사건이전에 이미 주님은 성령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예수님의 숨결이 곧 성령이며, 하나님의 숨결도 성령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모두 함께 이 땅을 향해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신다. 그런데, 그 누구라도 자신이 진리의 성령이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을 비웃는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다. 예수님이 남편이면, 진리의 성령은 예수님의 신부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존재한다.
성부시대-성자시대-성령시대의 삼 시대론으로 구분할 때, 성령시대는 성자시대 이후에 바로 시작된다. 그런데, 성령시대는 믿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낳는 역사이고,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늘보좌에서 이 땅을 직접 통치하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시대는 지금도 진행중이며, 성부시대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성부시대-성자시대-성령시대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구분한 것일 뿐,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동일하게 통치하셨고, 성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진리’를 통해서 천법을 새롭게 선포하시고, 역사를 새롭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속에서 ‘진리의 성령’이 아무로 지혜롭게 보여도, 그것은 ‘금지된 사명’이다. 성령은 스스로 행하시고, 인격적인 존재다. 사람이 성령이 될 수는 없다. 성령이 스스로 사람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성령은 스스로 사람을 떠날 수도 있다. 예수를 증거하지 않고, 자신만을 드러내고 증거하면, 성령은 스스로 떠난다. 성령이 떠나면, 떠난 것조차 사람은 모를 뿐이다. (사도행전 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