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을 읽을 때, 복음서를 읽을 때,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을 반드시 염두하고 읽어야한다. 죄사함과 구원과 영생은 ‘십자가-부활-성령’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구원의 책이다. ‘복음’(福音)은 축복의 소식이다. 무엇이 축복인가? 십자가-부활-성령이 각 개인을 위해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약정경이 없었고, 구약정경을 읽을 때, ‘십자가-부활-성령’의 키워드를 가지고 읽으면서, 영적인 양식을 먹었다. 우리는 먼저 신약정경을 통해 그렇게 해야하고, 이후에 구약정경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복음서-바울서신-구약정경 순서로 하는 것이 좋다.
해당 도서는 마가복음 16장 전체를 사건별 소제목에 맞춰서 ‘십자가’의 의미를 덧붙였다. 각 소제목마다 말하고 싶은 내용은 많지만, 축약해서, 십자가-부활-성령과 관련된 내용만 적었다. 또한 2p를 넘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쉽게 썼다. 읽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모든 챕터마다 ‘핵심 성경구절’이 나오고,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된다. ‘해석’은 십자가로서 의미다.
[막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다. 그런데, 주님은 사역을 행하시면서 성령충만으로 귀신축출을 했지만, ‘성령세례’는 베풀지 않았다. 부활하시고, 오순절 다락방을 기점으로 성령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성령을 받기 시작했다. ‘성령세례’는 곧 ‘십자가-부활-성령’을 전제한다. 십자가는 ‘죄사함’이며, 주님은 “회개하라”고 먼저 외치셨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죄를 회개해야한다. 그것이 물세례이다. 물세례를 받고서 죄를 자백하면, 그 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 ‘자백’이 용서가 아니고, ‘자백’을 한 죄는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는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1:9~11)
[막1:10~11]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물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노아의 홍수심판’과 ‘모세의 건져냄’과 ‘홍해의 기적’을 말한다. 노아 때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는데, 주님은 성령의 비둘기가 내려온다. 모세때 홍해가 갈라지듯 하늘이 갈라졌다. 물세례에서 불세례까지, 요단강에서 골고다 십자가까지 주님의 사역이 마쳐진다. 요단강은 알파요, 골고다 십자가는 오메가다. 물세례 후에 하늘이 갈라지듯, 불세례인 십자가 사건 이후에 ‘휘장’이 갈라지면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연결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은 아브라함의 이삭번제를 암시한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가 있었다. 모리아산에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한 것은 ‘순종의 대속물’로서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근본 뜻은 ‘죄사함’을 위한 십자가 대속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심하고, ‘순종’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리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렸다. 이것은 훗날 ‘성령세례’를 예고한다. 물세례를 받으면, 십자가의 피세례와 무덤에서 부활, 성령세례까지 모두 포함된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서 주님께 오신 것은 ‘십자가 이후 성령세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십자가 사건 이후 50일째에 일어났고, 유월절에서 50일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하사받듯, 초대교회는 십자가 사건 이후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통해서 새 언약을 받았다.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된다.
성령이 곧 예수를 몰아내신지라 (막1:12~15)
[막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인생에 광야가 찾아온다. 마귀가 시험까지 한다. 누구의 행함인가? 성령이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몰아냈다. 출애굽때, 바로왕이 완악한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바로 군대가 추격한 것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바로왕이 완악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지 않았다. 바로왕이 괴롭히니까, 노예생활이 힘드니까, 그곳을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서 광야로 내몰렸다. 그처럼, 예수님은 요단강물을 건너서 광야로 내몰렸다. 홍해표적과 신광야 40년이 요단강 물세례와 40일 광야생활로 압축된다.
모세는 ‘출애굽-신광야 40년’의 노정을 밟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홍해표적을 일으켰고, 광야에서 40일을 보냈다. 그렇다면, 들어가야할 ‘가나안’은 어디인가? “천사가 수종들더라”가 들어가야할 가나안이 ‘천국’임을 암시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정복을 위해 오지 않고, 죄사함을 통해서 ‘사망의 홍해’를 건너, 영생의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왔다. 성령을 받는 자는 영생을 상속받는다. 여호수아를 믿고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땅을 상속받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상속받는다. 성령이 곧 ‘영생의 증표’다.
1:15에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다. 여기서 ‘복음’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悔改)는 ‘죄’(罪)를 깨닫는 것인데, 도덕적 죄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관계가 절단된 상태가 곧 ‘죄’(罪)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죄’(罪)다. 회개는 죄를 자백하는 것이며, 토설한 죄는 십자가를 통해서 불태워진다. 눈물로 참회한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성령의 불’로 죄가 사라진다. 주님께서 용서한 죄는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정죄하는 자가 정죄받는다.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1:16~20)
[막1:18]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 ‘그물’은 작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버림’이다.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은 9:34에서 구체화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주님께서 불렀고, 제자들은 따랐다. ‘부름과 따름’은 곧 ‘사명과 소명’이다. 주님은 제자들을 2번 불렀다. 한번은 성육신으로 계실 때 불렀고, 12사도에게 귀신을 물리치는 권능을 주고, 전도여행을 보냈다. 첫 번째 부름이다. 두 번째 부름은 부활이후에 부른 것이다. 마가복음 16장에서 무덤에서 살아나시고, 제자들을 불렀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사람을 부른다. “죽은 데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자마다 주님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그물을 버리지 않았다면, 평범한 어부로 살았을 것이다.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누구의 부름에 응답하느냐가 중요하다. 대통령이 부르면, 장관이 된다. 하나님이 부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주님께서 복음으로 사람을 부르면, 믿는 자마다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베드로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는데, 그 베드로의 행함속에 우리도 포함된다.
베드로는 마가복음 16장에서 3번 부인했다. 주님께서 그러한 베드로를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하셨다. 16:71에는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되”라고 하면서 주님을 부인했다. 결국, “예수를 따르니라”에는 예수님께서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포함된다. 주님을 믿으면서 마음의 파도가 일어난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성령과 함께 살면, 모든 불안이 잔잔해진다. 사람의 말보다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한다. 성령이 사람을 통해 말할 때도 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