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2
마가복음 10장에 ‘모세의 이혼증서’ 말씀이 나온다. 이 사건을 깊게 상고하려면, 로마서 7장을 보는 것이 좋다.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아니다”(롬7:3)라고 했다. 마가는 ‘이혼증서’의 영적 의미를 고려해서, 이 사건을 편집했다. 단지, 해석을 독자에게 맡긴 것이고, 사도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율법과 이혼도장을 찍고, 신랑된 하나님께서 “신부된 교회”를 결단코 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선언이 담겨있다. 바리새인들이 시험하면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하지만, 결국 사탄이 바리새인을 통해 시험하면서 “죄인된 교회를 그냥 버리고 심판하는 것이 옳지 않나요”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때, 주님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다”라고 확정하시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임을 선언하시고, 남편으로서 그 역할을 하시겠다고 하신다. 신랑된 주님은 신부된 교회와 짝이다. 또한 교회는 세상에 대해 ‘구원의 짝’이다. 세상이 없다면 교회도 없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둘은 하나로 맺어져서, 세상을 버리면 교회도 버려진다.
이혼증서, 즉 ‘결별’은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이다. 본래는 세상과 하나님이 이혼한 상태였고, 결별함으로 ‘죄’에 놓였다. 죄(罪)는 서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죄인은 감옥에 갇히듯, 죄(罪)가 있으면 서로가 서로에게 갇힌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결별하고, 죄인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묻힘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이때 부활의 주님속에 세상 모든 죄인들의 이름이 들어있다. 주님이 그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은 죄값이 청산되고, 새롭게 부활한다. 왜냐면, 주님이 하나님과 결별하심으로 죄값을 청산해서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었던 은혜는 주님이 아들로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짐으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부자청년 (막10:13~31)
마가복음 10장에 어린아이 축복과 부자청년이 함께 나온다. 공통 키워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10:15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며, 어린아이를 안고서 그들위에 안수하고 축복했다. 반면, 부자청년은 슬픈 기색을 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그때, 주님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했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셨다. 이것은 ‘천국’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성경읽기에서 상당히 중요한 관점이 두 사건의 비교다. ‘하나님의 나라’의 공통 키워드가 있고, 두 사건이 서로 연결되었으니, 마가는 두 사건의 대조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다. 마치, 길가밭, 돌짝밭, 가시밭, 옥토밭의 비유를 극명하게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주듯 그렇다.
“어린아이”의 어떤 특성을 말한 것일까? 여기서 핵심 포인트다. 모든 어린아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마가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앞에 어린아이는 누구인가? 하나님앞에 부자는 누구인가? 어린아이는 100% 부모님을 의지한다. 곧,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어린아이다. 또한, 부자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이며, 부자청년은 ‘율법’과 ‘재물’을 의지했다. 헤롯은 ‘권력’을 의지했고, 제자들도 십자가 사건이 있기전에 ‘칼과 사람들’을 의지했다.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100% 성령을 의지했다.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만 들어가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면 성령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주님을 믿어야만 가능하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높으면, 하나님을 절대로 의지하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어린아이로서 십자가 길을 걸어가셨다.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이 명제를 통해 우리가 묵상해야할 것은 주님께서 바늘귀와 같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창조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천국가기 어렵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이 천국의 입구를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곧 ‘천국의 비밀통로’다. 부자(富者)중에 부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니, 우주의 상속자다. 그가 성육신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 몸소 시범을 보이셨으니, 곧 십자가의 길이다. 가난한 인간들은 무슨 말이 필요하랴.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32~52)
[막10:45]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5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마가복음은 ‘십자가-무덤-부활-성령’의 키워드로 읽으면 상당히 좋다. 성경은 ‘도덕책, 지혜책, 경제도서’가 아니다. 구원책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십자가-부활-성령’이다. 그러므로, 성경속에 있는 모든 사건은 구원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2절~52절까지 3가지 사건이 나온다. 십자가 사건 교육, 야고보와 요한의 권력청탁, 맹인 바디매오 사건이다. 이때, 36절과 51절 문장이 같다. 요한에게 던지는 질문과 바디매오에게 던지는 질문이 같다. 이것은 ‘의도적 편집’이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이다. 그런데, 요한은 “권력”을 구했고, 바디매오는 “보는 것”을 구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것을 알고 보고 믿는 것이 가장 크다.
주님이 주님 자신의 사명을 드러내서 증거한 성경구절은 마가복음 10:45이고, 43절부터 같이 암기하는 것이 좋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다. 대속물(代贖物)은 죄값을 대신 지불함을 뜻한다. 권력에 빠진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주님은 권력에 대신 넘겨졌고, 여리고 맹인 바디매오 눈을 보게 하려고 주님은 눈을 대신 감으셨다. 이것이 대속물(代贖物)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좌우편”을 요구했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함으로 발생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마음속에 임한다. 곧, 성령이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왕이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부활의 주님을 영접한 야고보와 요한은 이미 주님의 좌우편에 앉은 인물이 된 것이다. 또한, 지금도 동일하다. 천국은 계급의 서열이 아니고, 주님과 사랑이다. 주님은 지금도 묻는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