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7]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막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 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겸손한 나귀를 타셨다. 스가랴 9:9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은 왜 나귀새끼를 타셨을까?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혁명을 일으켜서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결심했으면, 심판주로서 백마를 타고 입성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등은 장관자리를 차지했을 것인데, 주님은 마병 대신에 ‘나귀의 작은 것’을 타셨다. 곧, 사람중에서 지극히 낮은 것, 사형수로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어린양’을 뜻한다. 주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나귀”가 되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래서 스가랴 9:11에 ‘언약의 피’가 나오는 것이다. 주님이 심판주로서 적폐를 청산했다면, ‘언약의 피’ 대신에 ‘사람의 피’가 흘렀을 것이다. 주님은 심판주로서 ‘심판받을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나귀의 작은 것, 겸손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신 주님, 한번도 타지 않은 나귀였다. 그리고, 한번도 묻히지 않은 돌무덤에 묻혀서 예루살렘을 떠나셨다. 이것이 인자의 권력이다. 군림하는 권력이 아닌, 섬김의 권력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대속물’로서 오신 것이다.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를 보면서, 그 시대 종교지도자만 욕하면 안된다. 우리와 그들이 무엇이 다른가!!
지금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에 불과하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한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으니,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곧 성령의 열매다. 주님이 기뻐하는 열매는 ‘기도와 찬송’이다. 입성할 때 찬송이 있었고, 성전정결운동에서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말씀했다.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뿌리째 말랐다. 그 나무는 ‘열매’가 없었을 뿐인데, 저주받은 나무가 되었다. 주님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과 모든 민족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저주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목마름으로 뿌리째 마르셨다. 주님은 ‘마른 무화과 나무’로서 십자가의 길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13:28에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라고 했다. 뿌리째 마른 무화과 나무에서 다시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가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주님의 가지인 제자 공동체에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셨다. 우리를 대신해 뿌리째 말라서 십자가에서 희생양이 되시지 않았다면, 어찌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으랴. 나는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에 불과하다. 주님덕분에 ‘죽을 운명’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