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8: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막8: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유대인과 “손씻는 문제”로 격돌하시고, 이방땅으로 전도활동을 펼치신 다음에, 4천명의 백성들이 몰려왔다. 사흘이나 굶었다. 이는 모세를 믿고, 노예제도를 벗어나 광야의 자유를 맛본 이스라엘 백성을 연상시킨다. 자유는 배고프다. 제자들도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홍해를 건넌 지 한 달이 지났고, 백성들이 기진맥진했다. 그때, 모세는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모세를 따른 백성들은 메추라기와 만나로 배가 불렀고, 주님을 따른 그때 백성들도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를 통해 일어난 ‘먹을 것’으로 배가 불렀고, 남은 조각이 각각 12바구니와 7광주리였다.
열왕기상 17장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를 향해 “네 손의 떡 한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다. 이후에 사르밧 과부가 여러 날 먹었는데,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의 살림을 책임지신 것이다. 표적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떡 한조각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칠병이어 표적도 동일하다. 주님께서 칠병이어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4천명이 배부르게 먹었다. 세상이 보기에 볼품없는 인생이어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칠병이어는 하나님의 떡이 되어서, 기적을 낳았다.
마가복음과 다르게, 마태복음에는 “요나의 표적”이 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그 시대는 니느웨 성이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 들어갔다가 살아났다. 주님은 무덤에 묻혔다가 살아났다. 물에 빠진 요나가 살아나듯, 주님도 죽은 육체가 실제로 살아났다. 제자공동체가 그래서 니느웨성처럼 회개한 것이다.
4천명이 굶주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고 물었다. 5천명이 굶주릴 때에도 주님은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고 하셨다. 떡은 몇 개 없었지만, 배불리 먹고 일곱 광주리, 열두 바구니를 넘치게 거두었다. 우리에게 경제적 떡이 몇 개 밖에 없고, 명예와 권력이 몇 사람을 움직일 정도로 미약하여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면 배불리 먹고 바구니와 광주리로 거둔다. 떡 몇 개는 믿음으로 바구니와 광주리다.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가? 그것이 핵심이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떡 몇 개를 가지고도 충분하다. 마가복음 8:14에는 “배에 떡 한 개 밖에 그들에게 없더라”고 했다. 떡이 딱 한 개 남았다. 사르밧 과부에게 마지막 떡이 남듯 그러했다. 그 상황에서도 주님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고 책망하셨다. 떡이 1개 있어도, 떡이 없어도, 주님은 떡을 놓고 염려하지 않는다. 오직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생각을 오염시키는 세속의 사상이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