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9장과 10장은 극명하게 대립된다. 9장에서는 요나단의 장애인 아들인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다. 그런데, 10장부터는 다윗의 추락이다. 암몬 족속에 장례 사절단을 보냈더니 수염이 깍여서 돌아왔다. 암몬 족속와 대전쟁을 할 때, 다윗은 왕궁에 있다가 밧세바와 불륜 스캔들이 터졌고, 그것을 덮으려고 했으나 남편 우리아가 말을 듣지 않으면서, 살인사건으로 확대됐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불륜을 터뜨린다. 지금의 미투운동이다. 다윗은 그때, 하나님께 자복하고 참회했다. 참회하지 않았다면, 나단 선지자는 죽었을 것이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늙어서 운명할 때까지도 생존했으니, 다윗의 참회는 진실하다. 10장~19장까지 모든 사건이 하나로 연결된다. 곧, 다윗의 불륜사건이 씨앗이 되어서 다윗 가문이 어떻게 몰락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는지 나타난다.
압살롬은 다윗을 향해 창세기 3장 뱀과 같고, 노아앞에 함과 같고, 에수님께 ‘가룟유다’와 같다. 이것이 성경적 지식이다. 유형학적 성경읽기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압살롭이 창세기 3장의 옛뱀과 같다면, 그것이 나에게, 읽는 성도에게 무슨 유익일까? 압살롬의 범죄자를 색출하면, 그러한 적폐청산으로 천국이 올까?
내 안에 숨어있는 압살롬은 누구이며, 함과 뱀과 가룟유다는 누구인가? 내 안에 ‘다른 이름’으로 숨어져 있다. 정의로움과 가족애로서 ‘압살롬’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압살롬은 여동생의 강간사건을 복수하기 위해서 칼을 뽑았다. 정의로운 칼이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다. 백성들의 재판에 관여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훔쳤다. 사람들이 보기에 공의로운 왕자였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했다.
다윗에게 보냄을 받은 선지자는 ‘나단’이었으나, 암논과 압살롬과 다말도 사건적 선지자로서 다윗의 마음을 기경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은 다시 광야길을 걸으면서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게 된다. 인생은 광야길이다. 하나님께 과연 맡기고 사는가? 압살롬의 쟁기로서, 마음을 기경할지라!! 내 안에 숨어있는 뱀이 들통날 것이다.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보냄을 받았다. 그렇다면, 암논은 다말 강간사건을 통해 2년이 지나서 죽임을 당했다. 암논에게는 왜 ‘선지자의 소리’가 보냄을 받지 못했을까?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그술 땅에서 3년을 망명했고,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2년간 거주했다. 5년이 넘었으나, 압살롬이 참회했다는 말도 없고, 다윗이 압살롬에게 “참회하라”고 선지자의 책망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알아서 하겠지….”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아들처럼 사랑해서 나단 선지자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회개의 단창’을 던졌다. 이것이 선지자의 소리다. 왜, 다윗은 아버지로서 자식들의 비리를 그대로 방치했을까? 내가 나에게 회개의 단창을 던지자!! 내가 나를 사랑하니, 진정 그러하자!! 회개의 단창은 자신의 마음을 가르고, 하나님이 흠향하는 번제물로 거룩케 한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번역하면, 자신의 눈에 있는 자기 들보를 먼저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비판하면, 비판받는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함으로 의롭게 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의로움에 이른다. 자기 내면 청소는 오직 물과 성령으로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