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곧 말이다. 글과 말은 물과 포도주처럼 상호변환능력이 있다. 글을 잘 쓰면, 말도 잘하고, 말을 잘하면 글도 잘 쓴다. 둘은 쌍둥이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글쓰고, 날마다 말한다. 복음을 외친다.
주님은 산에서, 해변가에서, 방에서, 회관에서, 밥먹으면서, 수시로 무시로 복음을 외쳤다. 성령에 붙들려 살았다. 곧, 성경말씀이 넘쳐나니 걸어다니는 말씀으로 행하신 것이다. 드라마를 좋아하면, 수시로 무시로 드라마 이야기만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것을 전파한다. 복음을 외치려면, 복음 제일주의가 되어야한다.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이 읽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냥 책을 읽듯이 밋밋할 때가 있다. 그때는 기도를 해야한다. 또한 찬양을 해야한다.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은 뉴스가 아니다. 구원을 주는 성령의 책이다. 신령한 언어가 사람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번역될 때, 깊은 뜻이 마음에 들어온다. 이것이 성령의 들을 귀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광야 길로 향하니라” (사무엘하 15:23)
기드론 시내는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면서, 건넌 곳이다. 요한복음 18:1에 나온다. 15:30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고 했다.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돌로레스’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려고, 다윗의 친구 후새가 성읍으로 돌아갔다. 그때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친구 후새, 아들 압살롬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압살롬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하면, 위험한 해석처럼 보여져도, 악인과 선인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보냄을 받은 모세와 세움을 받은 바로왕을 통해 이뤄진 구원의 작품이다.
내가 이단교회를 떠났을 때, 그러니까 2018년 11월에 기독교의 십자가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나는 이미 다윗처럼 광야길이었다. 보장받은 구원의 보증수표를 반납하고,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내듯이 나는 광야길로 향했다. 예수님은 다윗이 걸었던 광야길의 반대방향으로 예루살렘을 향했다. 왜냐면, 언약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니, 친구 후새가 성읍으로 가듯이, 말씀이 육신이 된 주님은 언약궤처럼 예루살렘 성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는 다윗의 광야길이다. 마가복음 1:9에서도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온 주님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했다. 광야길은 곧 성령의 길이다.
광야길, 즉 이단의 완벽한 교리를 떠난 성경해석의 길에 들어서면, 그곳에 자유가 있다. 진리의 성령은 ‘지식의 감옥’을 벗어난다. 진리의 성령은 ‘진리’속에 살고 계시는 ‘성령’이다. 진리는 곧 성경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신약의 핵심은 성육신-십자가-부활이다. 3가지는 절대진리다. 이것을 벗어나면, 어떤 능력의 영혼도 ‘진리의 성령’이 아닐 수 있다. 진리의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광야길’을 걷는 것이다.
압살롬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반역죄도 크고, 다윗의 궁녀를 겁탈한 것도 크고, 사사롭게 여동생의 원수를 갚아서 암논 왕자를 죽인 것도 크겠지만, 사람의 마음을 훔친 죄가 가장 크다. 사무엘하 15:6에서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고 했다. 이단교주는 성도들의 마음을 훔쳤다. 그 마음은 본래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자들은 강도요, 도둑이요, 절도다.
그렇다면, 이단의 교주만 죄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가 나의 주인이면, 나는 도둑놈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은 먼 곳에 있다. 세상명예와 부귀영화가 많은들 어쩌랴. 구원은 자신을 부정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길을 따름으로 얻어지는 선물이다. 그 길이 곧 광야길이다. 광야길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다.
** 사무엘하 15장과 요한복음 18장을 함께 펼쳐놓고 읽는 것이 좋다. 사도 요한은 사무엘하 15장을 보면서, 요한복음 18장을 기록했다. ‘기드론의 시내’가 그 단서다. ‘압살롬’은 ‘가룟유다’로 나타나서,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