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의 가나안땅 첫 전투다. 이스라엘 백성이 했던 일은 없다. 6일 동안 하루에 1바퀴 돌기, 7일째에 7바퀴 돌기, 그리고 함성 지르기였다. 그때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의 말씀이 입증된 순간이다. 나팔소리와 백성의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것을 기점으로 하나님께서 약한 지진으로 성의 벽돌을 흔들어 무너뜨리고, 공포에 빠진 여리고성 군대는 멸절했다.
권력은 여리고성과 같다. 제자들의 권력암투는 지독했다.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그 순간, 권력의 서열이 생긴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제자 셋을 따로 불러서 높은 산에 데려갔다. 누가복음에서는 “산기도”를 하러 갔다고 증언한다. 산에 내려와서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친 후에, 갈릴리에서 “십자가”를 다시 교육했으나, 제자들은 여전히 “누가 크냐”로 다퉜다. 권력의 여리고성이다. 주님은 “어린아이 전술”을 택했다. “낮은 자가 높다”는 것은 “십자가의 다른 이름”이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막9:35)
주님의 공동체는 권력의지가 없다. 권력은 주님께 있다. 곧, 하나님께서 모든 권력을 갖고, 행하시다. 심판의 대접은 천사들이 위에서 붓는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짐승의 권력이고, 주님의 공동체는 섬김의 권력이다. 섬기는 일이다. ‘권력의 지배욕구’는 여리고성과 같아서, 반드시 멸절되어야할 ‘어둠의 세력’이다.
주님은 단호하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라고 했다. 이런 어린 아이 하나는 주님을 영접한 ‘낮은 자’를 뜻한다. 주님의 공동체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섬기는 자가 곧 ‘어린아이’다. 주님은 섬기는 종으로 ‘죄인’이 되었다. (우리아는 다윗의 충성자로서 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 뻔히 죽을 길을 알고서 전쟁에 참여했다.)
“누가 크냐?”
막9:34에 “누가 크냐”로 쟁론했다. 누가 높은가? 헤르몬산이 높다. 그곳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졸았다. 눅9:32에 “깊이 졸다가 완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라고 했다. 권력의 깊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서 보면, 주님의 영광이 보인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고, 부활했다. 권력의지는 무덤에 묻힐 것들에 불과하다. 홍해를 건널 때, 이집트 군대의 칼은 빠져서 묻혔다. 주님의 공동체는 “누가 낮냐?” 그 경쟁이 있을 뿐이다. 낮은 자가 ‘어린아이’요, 그 어린아이를 주님께서 품에 안고 있으니, 그를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바람처럼 풍기면서 온다. 곧, 섬김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