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수6:1)
요단강이 열렸으나,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다. 오!!! 어쩌나?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리고성이 굳게 닫히는 사건을 자주 직면한다. 밖에서, 안에서. 복음을 전하면, 불신의 여리고성이 닫힌다. 거절당함은 내 마음의 문도 닫히게 한다. 그럴때마다, 주님을 향해 믿음의 성문을 열어야한다. 내 마음마저 닫히면 안된다. 여호수아 군대는 주님을 향해 성문이 닫히지 않았다. 닫힌 곳은 여리고성이다.
나는 내 삶속에서, 성경읽기에 몰두한다. 성령과 함께, 성령의 깨달음을 달라고 날마다 간구하면서 성경을 읽는다. 성경속에서 성령의 감흥이 없으면, 성경은 내게 ‘책’에 불과하다. 구원의 능력은 성경을 통해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일어난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성령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는다. 오늘은 성경을 제법 많이 읽었다. 그래서, 머리가 복잡했다. 성령께 깊게 간구하고, 성령이 원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하니, ‘여리고성과 12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이 왔다. 그래서 지금 글을 쓰고 있다. 12가지 이야기는 7가지로 다시 수정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돌짝밭” 비유가 나온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은 돌짝밭과 같다. 복음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죽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날마다 1바퀴씩, 7일째에는 7바퀴를 돌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니, 성벽이 무너졌다. 성벽은 하나님께서 무너뜨린다. 성령의 역사다. 내 마음속에 고쳐지지 않는 ‘고집의 고질병’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변화한다. 더불어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숙제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
무엇을 보는가?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보는가? 여리고성이 무너진다는 주님의 약속을 보는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고,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힙11:30)라고 했다. 불신의 여리고성을 믿지 말고, 믿음의 말씀을 바라봐야한다. 주님의 말씀이 정답이다.
만약, 여리고가 활짝 열렸다면, 이스라엘 군대는 자신들의 힘을 나타낼 것이다. 여리고성이 굳게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바로왕이 완악한 것도 하나님의 행하심이다. 우리는 간혹, 이것을 헤깔린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바로왕을 완악하게 하셨고, 바로왕의 왕고집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내쳐짐을 당한 것이다. 바로왕이 만약 세종대왕처럼 인자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고센땅에 그대로 눌러 살았을 것이다. 출애굽은 ‘모세와 바로왕’의 합작품이다. 여리고성이 굳게 닫힌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끔 하나님의 역사가 믿어지지 않을 때, 그럴때마다 “믿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때마다 주님은 믿음을 내려주신다. 믿음이 없는 것은 믿음을 얻기 위한 기회다.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주님을 만나서 믿음을 회복했다. 아멘!! 내면의 여리고성을 모두 무너뜨리자!!
2. 엿새동안 그리하라 (수6:3)
6일동안 1바퀴, 7일째 7바퀴를 돌고, 함성발사!!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아멘!!! 인생은 6일동안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살고, 7일째 주일에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으로 녹아져야한다. 주일날, 등산을 가거나, 영화를 보면서 딴 짓을 하면 안된다. 여리고성은 7일째 무너졌다. 그와같이, 주일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여리고성이 무너진다.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듯, 설교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각자의 심령에 있는 어둠을 몰아낸다.
천지창조는 6일동안 진행됐고, 7일째 하나님은 안식하셨다. 그런데, 여호수아 6장에서 하나님은 6일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바퀴씩 돌고, 7일째에 7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땅의 창조사역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뤄진다. 하나님은 6일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리고성 주변을 침묵으로 행진했다. 7일째는 일곱바퀴를 도셨다. 그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여리고성 함락 작전’을 펼치셨다. 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하는 신중의 신이다.
여리고성을 출발해서 예루살렘으로 행진한 주님은 성전정결운동을 날마다 펼치시고, 성만찬식을 마치시고, 그 성전에서 어린양으로 붙잡혔다. 여리고성벽에 내려진 빨간 리본처럼,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고, ‘구원의 문’을 이 땅에 활짝 열으셨다. 곧, 휘장의 찢어짐이다. 주님의 죽음으로 휘장이 찢겨졌고, 그것이 여리고성이 무너짐과 같다. 십자가를 통해 율법이 폐지됐다. 주님은 안식일에 무덤에서 쉬셨고, 8일째 부활했다. 주님의 부활은 마귀의 멸망이다.
3.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불고 (수6:4)
양각(羊角) 나팔은 ‘어린양의 복음’을 상징한다.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 주님의 복음에서 멀어지거나, 변질된 교회를 향해 책망했다. 니골라당 교훈을 특히 멀리하라고 경고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갔다. 주님을 믿는 자마다 입술에서 복음이 흘러넘쳐야한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뱀에게 전해야 했다. 하와는 뱀의 말을 오히려 남편에게 전했다. 그러면 안된다. 입술에서 세상 뉴스가 나오는가? 복음이 나오는가? 마음속에 쌓은 정보에서 정보가 나온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서 구원을 받길 원하면 안된다. 성경속에 구원이 있다.
암몬과 전쟁할 때, 언약궤는 전쟁터에 있었다. 그때 다윗은 왕궁 옥상에 있다가 밧세바의 목욕장면을 목격하고, 군침을 삼키다가 불륜에 빠졌고, 남편 우리야까지 간접 살해했다. 사람은 이렇게 간사하다. 양각 나팔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게 해야한다. 복음이 입술과 마음에서 떠나면 안된다.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의 나팔’이 울려 퍼지자, 그제서야 다윗은 양심이 살아났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아가 죽음에 처한 자식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면서 죄인으로 낮아졌다. 압살롬이 반역했을 때, 다윗은 밧세바와 불륜사건을 되새기면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감람산을 맨 발로 걸어 울며 지나갔다. 언약궤는 예루살렘 성으로 돌려보냈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할 때, 저주의 욕설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위대한 다윗이다. 골리앗을 물리칠 때보다, 시므이의 저주앞에서 무너지는 다윗의 신앙이 위대한 것이다. 다윗은 노년에 피난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모든 권력이 무너졌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4.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수6:10)
6일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의 행진을 했다. 단지, 나팔소리가 그들을 이끌었다. 요단강 동편을 차지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지파의 4만명 군대가 앞장섰고, 일곱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성은 언제 외치는가? 일곱째날이다. 6일동안 왜 침묵인가? 여리고와 같은 ‘세상 뉴스’를 보면서 세상에 점염되지 말라는 것이다.
전염병(傳染病)은 무엇인가? 세균을 옮기는 것이다. 전염병자가 병균을 옮기듯, 사람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사상’을 옮긴다. 과연, 어떤 사상을 옮기고 있는가?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 사상을 복음처럼 외친다. 주님을 믿는 자마다 복음앞에 바로 서야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않고, 오로지 양각 나팔 소리만 들었다. 여리고성은 굳게 닫혔으니, 들리는 소리는 양각 나팔소리다. 우리 인생은 평일에도 이렇게 살아야한다. 마음속에서 성령의 소리가 울려퍼지도록 세상을 향해 귀를 닫고, 복음을 묵상해야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릇’과 같다. 냄비에 라면이 담기면 라면그릇이고, 자장면이 담기면 자장면 그릇이고, 과일이 담기면 과일 그릇이다. 무엇이 담기느냐가 중요하다. 뇌(腦)도 머리통(囟)이 들어있다. 머리통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가룟유다는 마귀의 생각이 들어가니, 마귀의 도구로 쓰였다.
성령이 있으니, 악령도 있다. 악령은 가면을 자주 바꿔서 출몰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지혜의 나무’로 가장해서 나타났고, 빌립보에서는 베드로를 통해 사탄이 나타났고, 성만찬식에서는 가룟유다를 통해 나타났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야한다. 오늘은 내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해도, 내일은 광풍이 몰아칠 수도 있다. 요단강물에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도 성령에 내몰려서 유대광야에서 마귀를 마주했다. 마귀는 호시탐탐 사람을 노린다. 성령충만으로 마귀를 몰아내야한다.
5.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수6:10)
7일째에 외치라고 하니, 백성들이 외쳤다. 6일동안 양각 나팔을 들으면서,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함성발사!!! 그때,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백성들의 함성소리에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백성들이 침묵했고, 외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백성들이 외치니,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여리고성 함락은 홍해의 표적과 동일하다.
여리고성은 견고한 성벽이요, 홍해는 흐르는 물벽이다. 어떤 것이 더 어려울까? 홍해가 더 어렵다. 여리고성은 사람이 쌓았으니, 사람이 무너뜨릴 수 있다. 반면, 홍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흐르는 물을 막을 자 누구랴!! 게다가 이집트 군대가 공격하고 있는 그 때에 홍해는 죽음의 강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라”고 했다. 그때부터, 밤새도록 동풍이 불었고, 홍해가 갈라졌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지팡이를 들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밤새도록 동풍을 불게 해서, 홍해가 갈라진 것이다.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고 했다. 여리고성은 7일째에 외쳤다. 이제, 복음은 언제 외쳐야하나? 주님께서 살아나서, 제자들에게 “외치라”고 했다. 그래서, 믿는 성도에게는 평생 외치는 날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성도들은 외쳐야한다. 특별한 날만 외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외치면, 그것을 토대로 성령께서 행하신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외치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백성이 백성의 힘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복음을 외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다. 사람의 논리로 설득하려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
6.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수6:11)
여리고성 함락 작전에서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새벽에 일어나서 그는 분명히 율법을 묵상했을 것이다.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해야한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주식 챠트가 먼저 보이는가? 신문 뉴스가 떠오르는가? 드라마 제목이 생각나는가? 성경말씀과 찬양이 흘러나오는가?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된 것이 흘러 나온다. 여호수아는 날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했다.
마가복음 1:35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더니”라고 했다. 주님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에 이르러 기도하셨다. 새벽은 기도하는 시간이다. 시편110:3에서도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했다. 계시록 22:16에서도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했다. 새벽을 깨워야한다.
여호수아 입장에서, 6일동안 암흑이다. 첫째날 여리고성은 닫혔다. 둘째날에도 닫혔다. 여리고성은 요동하지 않았고, 철옹성처럼 침묵했다. 마치, 바로왕의 마음이 더욱 완고해지듯 그러했다. 창세기 1장에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날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둘째날이다. 저녁에서 아침이 되고, 그때 새롭게 시작했다. 변함없는 현실의 여리고성을 그대로 남겨두고,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말씀위에서 행하면, 기도한 것은 때가 되어서 반드시 이뤄진다.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한 시간도 새벽이다. 새벽녘에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최초로 영접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그 순간, 세상 뉴스가 들어오지 않는 그 시간, 마음의 문을 하나님께로 활짝 열어야한다. 세상은 밤이요, 주님은 ‘아침과 낮’이다. 모든 시간의 머리는 ‘새벽’이다. 새벽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루가 하나님의 것이 된다.
7.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수6:18)
여호수아의 첫 전투는 여리고성이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께 바치도록 했다.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승리하신 전투였고, 그래서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런데, 아간이 범죄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한다. 하나님의 것을 가로채면 절대로 안된다. 사람의 마음은 누구의 것인가? 하나님의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의 마음을 뺏는 자는 ‘강도’요, ‘절도’에 해당된다. 이단의 교주들은 다양한 성경해석과 지혜를 통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뺏었다. 곧, 옛뱀처럼 여자의 마음을 유혹한 것이다. 여자는 곧 성도들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 구분한 것이다. 많은 과일중에서 ‘선악과’는 금지됐다. 그처럼, 많은 돈중에서 금지된 ‘돈’이 곧 십일조다. 지갑에 할례를 해야한다. 할례(割禮)는 죽이는 예식이다. 동물을 죽이면, 그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피흘림이다. 돈중에서 ‘십일조’는 할례를 해야한다.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된 것은 하나님이 소유한다. 시간도 동일하다. 일주일 중에서 하루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도록 해야한다. 그것이 주일성수(主日聖守)다.
자식도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모세는 강물에 버려졌고,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건졌다. 곧, 구원이다. 성령께서 바로의 공주를 통해서 그 생명을 구원한 것이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깊은 고뇌에 빠져, 모리아산까지 삼일동안 걸어갔고, 그곳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쳤다. 이것이 인생이다.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기꺼이 바쳤다.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셨다. 하나님께 바치면, 부활이 약속된다. 이삭은 죽음에서 살아나서 모리아산을 내려왔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창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