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율법, 즉 모든 성경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정의된다. 마가복음 12:30에 나와있다. 12:30은 하나님 사랑, 12:31은 이웃 사랑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양심이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사랑의 빛’을 비추신다. 그런데, 양심이 죽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니, 그들의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으나, 믿지 않느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은 ‘사랑’이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태양이 불덩이라서, 빛을 내는 것과 같다. 사랑은 차별없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니, 그러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듯이, 사랑도 동일하다.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하나님과 얼마나 대화하고, 하나님께 관심을 쓰면서 살아가는가. 예수님은 2천년전에 태어나신 역사적 인물인가? 또는 그때 부활하시고 지금까지 영생으로 존재하면서, 이 땅에 살아계시는가? ‘살아계심’이 성경안에서만 존재하는가? 내 삶에 직접적인가?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막12:7)
포도원 살인사건 비유에서 농부들이 상속자 살해를 모의했다. 그리고, 상속자를 죽였다. 그 상속자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의 보기에 ‘상속자’는 ‘세상’에 대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에 대해 ‘상속자’를 말씀하신다. 히브리서는 증언하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주의 상속자가 되었다. 죽임을 당하심으로 그 시대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가 살아나심으로 ‘우주의 상속자’로 선포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이 지금, 내게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었는가? 예수님이 부활해서 나타난 제자들은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했다. 끝자락에 ‘불타는 떨기나무’를 목격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불이 붙었으나, 소멸하지 않는 떨기나무를 통해 ‘영생하는 하나님’과 ‘영생하는 떨기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그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했다.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막12:41)
예수님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자세하게, 가까이서 세밀하게 보셨다. 헌금하는 마음을 보신 것이다. 이것은 헌금하는 ‘삶의 자세’까지 보신다. 창세기에도 가인과 가인의 제물, 아벨과 아벨의 제물이라고 했다.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은 ‘가인의 삶’을 받지 않은 것이다.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은 ‘아벨의 삶’을 받은 것이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쳤다. 즉, 하나님께 모든 인생을 드린 것이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떡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리야에게 드렸더니, 떡과 기름이 넘쳐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풍족하게 도와주신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께 살아있는가? 예수님이 지금도 친구인가? 예수님이 멀리 천국에 계시는가? 지금, 집에서 함께 살고 계시는가? 주님은 날마다, 지금 이 순간 마음의 초인종을 누르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