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나오시니, 대제사장들이 군대를 이끌고 주님을 체포했다. 그때 베드로가 칼을 뽑았으나, 주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다.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에 하늘의 천사가 칼에 칼집을 꽂았다. 전염병 심판이 7만명에서 멈췄다. 칼을 칼집에 꽂고, 주님은 십자가의 칼을 받으셨다. 이것이 인류에게 허락된 생명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는 재앙이 아니고, 축복이다. 왜냐면, 무덤에서 주님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14:50에서 제자들이 다 도망갔고, 베드로는 주님이 보는 곳에서 3번이나 주님을 부인했고,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다. 그때, 닭이 2번 울었다. 베드로가 3번 부인하고, 닭이 2번 울자, 그때 베드로는 닭처럼 울었다. 이것이 통곡의 닭 사건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한 것은 ‘십자가의 뜻’을 몰랐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자기가 원하는 그리스도’를 깨뜨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을 뿐, 근원적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원했는데, 하나님은 그 자식을 모리아산에 번제로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3일동안 걸어가서 이삭을 번제로 바쳤다. 칼이 목을 치려는 찰나, 0.1초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극적으로 막았고, 이삭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둘은 각각 다른 길로 내려왔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가?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나타난 현실은 체포영장을 들고 찾아온 로마 군대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인생가운데 찾아오는 환란은 대부분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된다. 사람들은 ‘봄’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겨울’을 허락하시면서 봄을 맞이하게 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울없는 봄’을 원한다. 이것이 사람과 하나님의 근본된 차이점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 사망을 이기고, 무덤에서 부활했다. 그리고 영원히 사신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 “나쁘고, 의리없는 제자들!!”이라고 욕할 수도 있지만, 누구든지 그 자리에 있으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왜냐면, 주님께서 “너희들이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또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으나, 모든 제자들은 그것을 “비유”로만 이해했다. 그런데, 실제 십자가였다. 지금도 동일하다.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존재다. 의리를 내세우는 베드로처럼,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충성맹세를 해도, 현실에 이르면 닭이 울기전에 이미 부인한다.
닭이 울기전에, 즉 깊은 밤이 찾아오면, 흑암이 우리를 덮으면, 주를 부인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방법은 유일하다. 주님이 우리안에 계실 때, 성령이 임할 때, 그때 주님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을 버리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듯이,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 안에 거주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든지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있고서, 제자들은 성령의 뜻으로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다. 성령이 아니면, 사람은 새롭게 될 수가 없다. 오늘, 나는 성령으로 살아가는가? 성령의 불로 나를 태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처럼 애통할 줄 알아야한다.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그대로 드러냄으로 마가복음의 증인이 된 베드로의 삶이 곧 ‘진실한 증인’이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