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수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했다. 예언적 명령이다. “3번 부인하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문이다. 예언은 반드시 일어날 미래를 확정한다. “바벨론에 함락할 것이다”는 곧 “바벨론에 함락하라”이다. 그와같이,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부인하라!”고 하신다. 어찌 이런 명령문이 나올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주님을 믿으면 결국 ‘한계’에 부딪힌다.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의 믿음’으로 믿는 것이지, 절대로 인간의 의지로는 믿을 수가 없다. 인간의 의지로 주님을 믿게 되면, 결국 ‘부인’(否認)하게 된다. 이것이 지식의 한계상황이다. 적그리스도들이 출현하는 것도 결국 주님을 인간적으로, 지식으로, 자기 견해로 믿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단의 교주들은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할 때, 그때 ‘인자의 영광’이 임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 75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과연, 그가 그 약속을 믿었는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실 때마다,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거론하거나, “이스마엘이나 잘 살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하갈이 뒤통수를 때렸다. 사라의 추천을 받은 하갈이 ‘본처’ 자리를 넘보면서 아브라함 가정에 분란이 생겼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을 준행하신다. 인간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취소되지 않는다. 가룟유다처럼 근본적으로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언약을 실행하신다. 십자가를 통한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님의 육체’를 통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언약이다. 그것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받는다. 영생이 곧 ‘이삭의 언약’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밑바닥을 보일 때, 그때가 99세이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된다. 멸망과 축복이 동시에 일어났다. 그와 같이,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히고, 부활하셨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고, 1년 후에 이삭이 태어나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모든 죄문제를 청산하고, 이후에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또한 헤롯성전의 멸망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다. 헤롯성전이 멸망하면서, 주님의 교회 공동체가 로마제국에 세워졌다. 왜, 교회에 다니는가?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 그것은 인간적 욕망의 포장지다. 포장지가 찢어질 때, 내용물이 드러나듯이, 인간은 욕망의 무화과 잎사귀를 벗어야한다. 그때 주님께서 새로운 옷을 입혀주실 것이다.
밑바닥을 보이지 않으면, 주님은 기다리신다. 그래서 빨리 회개하고, 주님앞에 엎드리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가룟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지혜를 고집했다. 그래서 칼과 몽치를 들고서 주님을 잡으로 온 것이다. 그는 주님을 향해 “입맞춤”을 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 참으로 대비적인 모습이다. 입맞춤을 한 자는 배신자요, 도망간 자는 결국 돌이킨 자이다. 베드로는 3번이나 부인하고, 닭이 울자 자신의 모습을 통곡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울었다. “닭이 두 번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막15:72) 반면, 가룟유다는 자신의 감정으로 뉘우치고, 목을 메달아 자살했다. 말씀을 중심해야 회개할 기회가 찾아온다.
마가복음 14:9에서도 주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했다. ‘기억’(記憶)은 영혼을 소생케 한다. ‘망각’(妄覺)은 마귀의 지혜다. 마귀는 망각을 통해 무색무취 마취제를 뿌린다. 자신의 실수, 자신의 첫사랑, 자신의 열정, 자신의 죄악 등등 과거의 모순과 업적을 망각하는 자는 역사를 잃은 것으로 현재와 미래가 죽은 것과 같다. 그래서, 인생은 주님을 뿌리로 삼고 살아야한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기억의 총체’이다.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지금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