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성경을 읽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말세가 되면 귀가 가려워지면서 자신의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다. 그 누가 자신을 소개하길,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하겠으며, 그 누가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외치겠는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무익한 종은 모두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의 대신자’가 되어서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누가는 붓을 들고, 모든 근원을 자세히 살펴서 복음의 순서와 질서와 사실관계를 파악했다. 성도는 요즘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서 복음을 읽어야한다. 너무 많은 학설, 지식, 성경해석, 교리들이 출현했고, 이단의 것들이 때론 더욱 지혜롭기도 하고, 정통교회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무엇이 옳거나 틀림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스스로 알고, 복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극히 작은 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것이 낫다”라고. 스스로 행하지 않고서 지혜로운 말들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삶은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곳에 어찌 성령의 은혜가 있겠는가? 내 자신을 비쳐볼 때 그렇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거울삼아, 내 자신을 보려고 몸부림을 친다.
어떤 종교단체에 대한 소식들이 올라온다. 가령, 신천지(新天地)는 ‘사회악’으로 규정됐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신천지를 “이단중의 이단”으로 매도한다. “이단중의 이단”은 본래 교회였고, 바울은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지목받았다. 그러므로, 특정 종교단체를 “마녀사냥”으로 정죄할 경우, 성경적 모순에 봉착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태동했을까? 교회안에는 “이단적 요소들”이 없을까? 그것을 물어야한다. 왜, 그들이 그렇게 활발하게 돌아다닐까?
신천지는 새하늘과 새땅을 말한다. 그리스도안에서 성도는 새로운 인격체로 탄생한다. 교회를 다니는 것이 곧 천국이다. 세상을 벗어나서 교회에 태어난 것인데, 교회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찌 될까? 즉, 교회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에 빠진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곳은 교회인가? 세상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출교’는 사회적 고립이다. 세상에서 버려짐을 당하는 것!! 그것이 ‘소금’이다. 소금의 역할을 다하면, 그때 소금기둥은 버려짐을 당한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 제자들을 향해, 따르는 무리들을 향해 축복을 했던 ‘소금’은 ‘소금돌’을 말한다. 소금돌을 채취해서 짠 물을 모두 뽑아내면, 소금기가 사라진 돌은 길바닥에 버려진다. 그렇게, 제자들은 버려져서 짓밟힘의 핍박을 받았다. 소금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교회는 현재 핍박과 짓밟힘을 당하는가? 짓밟고 있는가? (신천지의 종교단체가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선교전략을 펼쳤는데, 나는 그것을 증오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이 졀코 아니다. 그러나, 정통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서있다면, 그러한 바이러스의 공격에 왜 시달리겠는가. 하나님은 이단을 허락함으로 정통교회의 잠든 부분을 깨우신다.)
누가는 마가와 다르게, 사가랴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마태는 ‘족보와 요셉과 동방박사’ 사건을 드러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증거했다. 누가는 제사장인 사가랴,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의 이야기를 1장에 기록하고 있다.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부모세대를 봐야한다. 그것이 뿌리다. 어떤 종교단체가 교리가 탁월하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종교단체에 구원이 있는가? 물어야한다. 종교는 ‘영웅’이 아니다. 영웅을 찾으려면, 히틀러와 알렉산더와 헤롯대왕을 따라야한다. 그들을 따르면, 가지고 있는 힘으로 세상을 호령하면서 살겠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근본으로 하니, 세상 것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셨다. 신앙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주의 모든 명령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자들이며, 마치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평생 아이가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섬겼던 자들이다. 그때 가브리엘이 자녀의 축복을 주고, 세례요한이 태어났다. 하나님은 성도의 간구를 항상 듣는다. 사가랴가 그 축복을 받은 장소가 ‘교회’였다. 교회에서 직분을 행하다가, 천사의 방문을 받았고, 말문이 막히면서 잉태 소식이 있었다. 마리아는 정혼을 했으나, 동거하기 전에 가브리엘의 축복을 받고 잉태를 하게 된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덮으면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서 주님은 성육신으로 잉태되셨다. 누가의 붓은 이 사건을 매우 예리하게 적고 있다. 1:38에서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뤄어지이다”라고 고백했다. 말씀대로 이뤄진다고 고백한 그 순간에 이미 잉태가 된 것이다.
누가복음은 누가 스스로 쓴 것이 아니다. 눅1:3에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라고 고백한다. ‘모든 일’은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을 말한다. 이미 출간된 저술들을 자세히 살피고, 확인한 누가는 모든 사건들의 진상을 확인하고서, 새롭게 편집한 것이다. 누가는 ‘마가복음’을 기준으로 새로운 사건들을 덧붙였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들’을 원하지만, 복음은 이미 있었던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읻. 이미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는가? 복음은 이미 있었던 것에서 조금 새롭거나, 이미 있던 것의 반복일 뿐이다. 이미 있었던 것을 반복함으로 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을 새롭게 만든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말씀으로 행하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살아났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죽으셨는가?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눅1:39에서 마리아가 엘리사벳이 사는 집까지 방문한다. 그곳에서 3달을 머물렀다. 이 사건은 복선이 깔려있다. 즉, 30년후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을 것을 예표한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방문한 것을 말한다. 마태복음은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온 것을 나타내지만, 누가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면, 죄인된 인간은 구원받을 길이 없다. 주님은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셨고, 대제사장들에게서 빌라도에게 넘겨짐으로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셧다. 이방인의 권력으로 넘겨짐으로 인류는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