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 누가복음 7장을 읽었다. 6장에서 12사도를 임명하고 ‘산상수훈 요약본’으로 교육하시고, 7장에서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치료하고,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살리시고, 세례요한의 질문을 받으시고, 향유옥합을 붓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셨다. 3번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례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누가는 왜!! 4가지 사건을 나열식으로 배치했을까?
1) 백부장(남)-나인성 과부(여)-세례요한(남)-향유옥합 여인(여)로 구성된다. 남녀-남녀로 배치했다.
2) 죽음에 처한 종-죽어버린 독자-옥에 갇힌 죄인-동네에 죄를 지은 여자로 구성된다. 종과 독자는 모두 살아났다. 향유옥합을 부은 여자의 죄는 용서받았다. 그렇다면, 주님께 물세례를 한 세례요한의 의심은 어찌 되었을까? 향유옥합 여인은 동네의 죄인이고, 세례요한은 세상적으로 민족의 죄인이었다.
3) 가버나움-나인성-마케루스-?로 이어진다. 주님은 백부장의 초대로 가려고 하다가 들어가지 않고서 종을 살렸다. 나인성에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장례행렬을 맞이했다.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두 제자를 보내서 주님께 질문했다. 시몬의 집에 있는데, 향유옥합을 가진 여인이 직접 찾아왔다.
4) 4가지 사건은 “울지말라”고 귀결된다. 모두 슬픈 사건이다.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 죽을 병에 걸렸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다. 향유옥합의 여인은 동네에서 죄인이다. 종의 병이 치유됐고, 과부의 독자가 살아났고, 여인의 죄가 용서받았다.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세례요한이 잠시 주님의 사명을 오해함으로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4가지 사건을 통해서 그는 “굳건한 믿음”으로 헤롯왕의 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칼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감옥에서 목베임을 당했어도, 순교자로서 마지막 모습을 보이면서, 신앙심이 살아났다.
백부장의 믿음으로 죽을 병에 걸린 종이 살아났다. 나인성 과부의 독자는 주님이 불쌍히 여김으로 살렸다. 세례요한은 잠시 의심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을 모든 백성앞에서 선포했다. 백부장의 믿음처럼, 주님의 믿음으로 옥에 갇힌 세례요한의 신앙이 살아났을 확률이 높다. 만약, 요한의 신앙이 흔들렸다면, 세상과 타협해서 가석방되었을 것이다. 요한은 끝까지 견뎠다.
예수님은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말했다. 해당 구절을 보고서, 세례요한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면, “너희”에게 묻는 질문이다. 백성들을 향해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이다. 백성들에게 세례요한은 어떠한 존재인가?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과 아무 상관없는 문장이다.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누가복음 3장과 연결된다. 세례요한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서, 세상을 판단하는 칼날로서 거침이 없었다. 주님은 그것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25절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는 헤롯왕을 뜻한다. 헤롯왕은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고 백성들에게 평안을 주려고 했으나, 세례요한은 피리부는 국가정책에 춤추지 않고, 슬픈 심판을 선포했다. 이사야 선지자처럼 ‘민족의 죽음’을 예언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장례식에 ‘축제’를 다시 선언하신다. 죽음에 처한 백부장의 종이 살아났고,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살아났다. 주님은 장례식에서 “울지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당신의 장례식에 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울지말라”고 하신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이 살아났기 때문이다. 슬픈가? 울 것 없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슬픈 일이 잠시 있게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