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요약본이 누가복음 6장에 들어있다. 말씀선포가 끝나고, 곧바로 백부장의 종 치료, 나인성 과부의 아들 기적, 세례요한의 의심,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죄사함이 들어있다. 4명의 등장인물 중에서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길다. 그런데, 난해하다. 백부장의 종은 중병을 앓았는데, 믿음이 커서 나았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었는데, 장례식을 본 예수님이 관에 손을 대니, 죽은 청년이 살아났다. 향유옥합을 부었던 여인은 그 동네에서 죄인인데, 주님께서 “죄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두 제자를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힌 정치범이다. 그것을 알아야한다.
누가복음 7장은 남자+여자+남자+여자로 배치됐다. 또한, 군대지도자+평민+종교지도자+평민으로 배치됐다. 또한 죽을 사람+죽은 사람+갇힌 죄인+동네 죄인으로 배치됐다. 주님은 죽을 병에 걸린 백부장의 종을 가지도 않고 고쳤다. 죽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를 관에 손을 대고서 살리셨다.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죄를 용서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무엇인가? 누가는 왜!! 세례요한의 사건을 여기에 넣었을까? 깊게 고찰해야한다. 다른 3명의 인물은 세례요한을 조명하기 위해서 편집된 것이다. 누가복음 초반부에 세례요한의 출생이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는 세례요한의 사역을 부각시키려고, 나머지 3명을 함께 기술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나머지 3명처럼 ‘믿음의 표상’임을 인정해야한다.
근거는 이것이다. 군대 지도자인 백부장은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고, 예수님이 직접 찾아가자, 백부장은 벗들을 다시 보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면서 찾아오시는 것을 거부했다. 그와같이 세례요한도 예수님께 제자 둘을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으면서, 성경적 답을 구하고 있다. 그때 주님은 명확한 답을 주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에 따라,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답을 주니, 세례요한은 ‘자신의 갇힘’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옥에 갇히면, 누구든지 마음이 공허하고, 곤고하다. 그래서, 주님께 묻게 된다. “내가 주님의 뜻을 따라 행했나이까”라고. 주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비켜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죽음의 잔, 환란의 잔은 누구든지 겁난다.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 고침을 받고,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살아난 것도 주님의 뜻이고,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죽는 것도 주님의 뜻이다. 죽음과 살아남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십자가를 예표하고, 예비하기 위해서 그 길을 갔던 것이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흔들리는 갈대냐” (눅7:24)
해당 구절은 가장 통쾌하고, 자랑스러운 문장이다. 주님은 세례요한의 강인함을 믿은 것이다. 세례요한은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 흔들리는 갈대는 헤롯왕 안티파스다. 정치인들은 갈대처럼 오락가락한다. 빌라도에게 붙었다가, 백성의 눈치를 살피다가, 헤로디아의 딸의 말에 끌려가는 그런 추태를 보인다.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예언’을 끝까지 선포했다. 세례요한은 그 시대앞에 ‘장례식’을 선언했고, 예수님은 그 장례식 위에 ‘혼인잔치’를 선언하셨다. 죽음과 부활이 함께 맞물린다.
7장 32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장터에 앉아서 말하는 아이들은 누구인가? 그 시대의 사람이며, 곧 권력자를 말한다. 정치와 종교 권력자들이 피리를 불면서 잔치를 선포해도, 세례요한은 춤을 추지 않았다. 헤롯왕이 로마권력과 평화를 선포하고, 성전을 건축하면서 ‘잘살아 보세’를 말했지만, 세례요한은 “회개하라”를 외쳤다. 헤롯왕의 생일잔치에서도 세례요한은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순교를 당했다.
그런데, 주님은 세례요한의 길과 정반대다. 세례요한은 장례식을 말하는데, 주님은 혼인잔치다. 그래서,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는데, 장례식에 가서 “울지말라”고 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는데, 주님은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이 출간되었을 때, 유대교는 로마군대와 격돌했다. 그 시대는 슬픔의 장례식이었다. 주님을 믿는 자들은 “울지말라”를 선포했다. 유대교는 장례식을 맞이했으나, 기독교는 유대교를 벗어나서 새로운 부활을 맞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피리를 불면, 거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사는가? 복음에 따라 살고 있는가? 자신을 들여다 봐야한다. 세상 장단을 맞추다가, 영혼이 멸망으로 점점점 기울어 갈 수도 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눅7:27)
해당 구절을 보더라도,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한 것은 십자가의 길을 준비한 것이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주님의 대속적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길을 ‘순교’로서 나타난 위대한 선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