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
마가는 로마제국과 유대교앞에 충격적 선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곧 다윗의 왕권을 계승한 분을 말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육체를 뜻한다. 또한,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왕중의 왕’을 상징한다. 하늘로서 왕이요, 땅에서도 왕인 예수님을 뜻한다. 그런데, ‘복음’은 뉴스다. 황제의 즉위식에 등장하는 단어로서, ‘공표’에 해당한다. 로마제국 시대앞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황제의 즉위식’이라고 마가는 목숨을 내걸고 책을 썼다. 이것이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출판때부터 시대앞에 피흘림의 도전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외침을 살아있다.
이사야 40:3이 인용된다. 이사야서는 1~39장이 바벨론 포로이고, 40장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면서 해방이 선포된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인 인용법이다. 이사야 40:1에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사야의 선포를 통해, 바벨론 포로생활은 70년으로 끝나고 고레스 황제가 출현해서 ‘본국으로 귀환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페르시아의 속국, 헬라제국의 속국, 로마제국의 속국으로 살아간다. 영원한 식민지 생활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동안 맴돌 듯이, 400년동안 이스라엘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맴돌았다. 그들은 열방의 제국에서 독립을 원했으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 대해 ‘죄로부터 해방’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궁극적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다. 이와 관련해 마태는 1:21에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고 증거한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1:10)
요단강물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창세기 1:2 사건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운행’이란 단어는 비둘기가 날개짓하듯 생동감있게 움직이다는 뜻이다. 태초의 창조사역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과 말씀이 함께 행하셨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요단강물에 나타나셨다. 성령님은 비둘기의 형체로서, 하나님은 말씀으로서, 성자 예수님은 실제 육신으로 오셨다. 그리고, 성령님과 하나님은 연합해서 예수님을 증거하신다. 이날, 하나님과 성령님이 예수님을 새롭게 낳으셨다. ‘낳다’는 것은 ‘새롭게 하다’는 뜻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마귀의 3가지 시험이 나온다. 성령에 이끌려서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성령님과 주님의 연합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서, 마귀를 물리쳤다. 우주적 대전쟁에서 성삼위 하나님은 마귀를 이미 이기셨고, 이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땅의 전쟁에서도 이기셨다. 이기심의 증표가 유대광야에서 3가지 시험이다. 여호수아는 요단강물을 건너면서 여리고성 전투, 아이성 전투, 기브온성 전투를 모두 이겼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3대 전투다. 그처럼 예수님은 성령님과 연합해서 마귀의 3가지 주요 성읍을 함락했다. 곧, 경제적 성읍, 능력적 성읍, 권력적 성읍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전쟁에서 이겼다. 그처럼 성령님과 연합한 주님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이것이 땅에서 예수님의 영적 첫 전투다. 유대광야에서 주님은 백성을 대표해서 대승을 거두시고, 또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을 당하면서 전세계를 대표해서 승리하셨다. 전세계를 대표한 것은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인 빌라도의 판결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하나님의 나라는 막연하지 않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진다”고 했다. 이것은 하늘의 승리가 땅의 승리가 되길 바라신 주님의 기도다.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헤롯대왕은 안토니우스의 계열이었다. 로마제국의 분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자, 헤롯대왕은 즉시 옥타비아누스를 찾아가서 엎드렸다. 이것이 권력의 복음이다. 복음은 ‘소식’이다. 옥타비아누스가 이겼기 때문에 헤롯은 어떤 망설임없이 옥타비아누스에게 엎드린 것이다. 그와같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고, 하나님은 우주적으로 마귀를 굴복시켰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이겼으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엎드려야한다. 경배받을 분은 하나님 외에 없다. 나머지는 ‘패한 자’에 불과하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사람이 곧 베드로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한 것은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것을 훗날 깨닫지만, 복음의 근본은 ‘위대한 승리의 소식’이다. 승전보에는 도덕적, 경제적, 양심적 성과가 필요없다. 하나님이 이겼으면, 그것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한다. 하나님을 믿고, 도덕적으로 착한 행실을 해야만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마귀의 안식처인데, 마귀가 패했으니, 예수님을 믿으면 죄는 허물어진다. 일본이 무조건적 항복을 선포하니,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와 같다. 인간의 노력은 아무 필요가 없다. 마귀가 패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막1:17)
나는 이 대목이 정말로 좋다. 예수님이 내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말씀을 묵상한다.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할 때에도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서 유대광야로 가셨다. 그 주님께서 이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연합을 말한다. 주님을 따라가면, 새로운 피조물로서 창조된다. 요단강물에서 세례를 받고 나오셨을 때, 나타난 그 사랑의 연합속에 베드로가 들어간 것이다. 주님을 따르면, 마귀가 두렵지 않다.
가버나움에 갔을 때, 귀신들이 주님을 알아봤다. 빛이 나타나니, 어둠이 물러가는 것이다. 귀신들은 박쥐처럼 동굴을 좋아한다. 가장 깊은 동굴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귀신들은 사람속에 머물러 있다. 번잡하고, 걱정과 불안이 많은 사람들은 찬양함으로 귀신을 몰아내야한다. 성령은 심령의 깊은 곳을 아신다. 빛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깊은 동굴속에 숨어있는 마귀들이 달아난다. 거라사인 공동묘지에 군대귀신 들린 자처럼, 심령의 깊은 무의식속에 주둔한 귀신들이 있다. 그들을 없애려면, 성령님께 간구해야한다. 주님이 오면, 마귀는 물러간다. 그래서 마음깊은 곳에 주님이 임해야한다. 마음속에 깊은 것을 주님께 고백하면, 그것이 주님을 초대하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귀신을 물리쳤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물리쳤다. 병을 고치신 그 능력은 치유력을 넘어선다.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고 했다. 창조주로서 사람의 고장난 열병을 물리치신 것이다. 마태는 이 사건에 대해 “열병을 담당했다”라고 증거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함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다. 그랬더니, 그녀가 천사처럼 수종을 들었다. 주님은 다음날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다. 전도는 ‘도’(道)를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곧 전도다. 복음은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코로나19가 한국에 상륙하니, 모든 국민이 오합지졸이 되었다. 바이러스도 그렇게 영향력이 있는데, 하물며 성령의 능력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