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만왕의 왕이다. 왕(王)은 말의 권능이 있다. 주님은 무엇을 명령하고, 어떤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는가? 그 백성은 어떤 복지혜택을 받는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종교로 분류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관점이고,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선포’다. 복음(福音)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선포의 의미다. 곧, 황제의 즉위식과 같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어떻게 다스리는가? 믿음과 기도와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린다. 통치방식이 전혀 다르다. 세상은 세상의 제도가 있지만, 그러한 제도 전체를 움직이는 근원의 힘이 말씀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나타나서, 그것을 보이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 그 예수님이 지금도 이 땅을 내려다보신다.
주님께서 어떤 집에서, 어쩌면 베드로 장모의 집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때 지붕을 뜯고, 중풍병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중풍병자의 강림사건’이다. 주님은 보란 듯이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설교를 방해한 죄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죄가 있어서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중풍병에 걸리게 한 그 죄가 용서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격적 선언이다. 유대 지도자들앞에서 “내가 창조주 하나님이다. 죄를 사하는 권능이 내게 있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마귀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한 것과 같은 선언이다. 마귀는 권능을 알고, 물러가는데, 사람은 그것을 모르니까 반대하고 오해하고 의심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풍병자가 그 자리에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다. 이것은 중풍병을 고치는 치유능력이 아니다.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께서 중풍병을 통해서 ‘지상천국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면, 두 부류로 나뉜다. 연합하는 부류, 반대하는 부류다. 말씀이 선포되면, 말씀에 연합하거나 말씀에 반대한다. 주님께서 죄사함의 권능으로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다. 그때 중풍병자는 일어나서 걸어갔다. 중풍병자는 주님과 말씀과 성령으로 연합한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능력이 중풍병자를 일으켰다. 이것이 사랑의 능력이다. 요단강물에서 성령님, 하나님, 주님이 연합했다. 반면, 유대광야에서 마귀가 주님을 시험했다. 그처럼 말씀이 선포되면, 선과 악이 분립된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야한다. 분립되는 그 중간에 사람이 있다.
중풍병자가 원한 것은 ‘병고침’이다. 그런데, 주님은 ‘죄사함’을 말한다. 무엇이 근원적인가? 사람들은 당장에 현실문제를 해결하길 원한다. 한국교회가 왜 기복신앙으로 흘렀는가? 대학합격, 회사승진, 아파트당첨, 교회건축, 결혼 등등 자신이 원하는 것만 기도한다. 그것이 해결되면, 천국인가?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병만 고치지 말고, 죄문제를 해결하라”고. 곧, “회개하라!!”고 그 순간에 말씀했고, 중풍병자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자복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한 것은 “네가 죄가 있다”고 선언한 것과 같다. 지붕을 뜯고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주님은 ‘인식관의 지붕’을 뜯고서, 망치로 머리를 때리신 것이다. 주님은 각 사람의 지붕을 뜯고서, 정신머리를 새롭게 고치길 원하신다. 자신이 원하는 그것만 해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결국 ‘죄’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2:17)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 여기서 의인은 자칭 의인이다. 도덕적, 지식적, 권력적, 정치적, 예술적 성과를 추구함으로서, 자신이 스스로 의인된 사람들은 주님앞에 올 수가 없다. 주님은 고장난 사람을 고치러 오셨는데, 스스로 고장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주님이 고칠 수 있는가. 그래서, 중풍병자는 자신이 아픔을 통해서 마음의 죄를 오랫동안 깨닫고 회개하면서 살았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으로 받아드린 것이다.
마태도 동일하다. 당시 세리들은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백성들의 돈을 착취한 직업을 갖다 보니, 사람들로부터 욕을 얻어먹고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주님은 그러한 마태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태였으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자신의 열등감앞에 주님의 복음은 새로운 문을 열어준다. 곧, 창조주 하나님께서 마태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다”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의 복음은 죄를 용서한다. 어떤 조건과 의식이 필요없다. 단지 상징적 사건으로 ‘세례’가 있을 뿐이다. 강물에서 세례를 하든, 그릇에 있는 물로 뿌려서 하든, 주님은 모든 것을 허용하신다. 물이 뿌려지면, 그것이 수면위로 운행하시는 성령을 상징한다. 세례를 받으면, 주님의 땅이 된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성령님과 하나님과 주님의 울타리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가 사라진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막2:19)
주님은 신랑으로 오셨다. 신부는 어디에 있는가? 혼인집 손님들이 신부된 교회다. 주님은 신랑이고, 주님의 나라가 곧 신부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남편’으로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불렀다. 이스라엘은 처녀였고, 하나님은 남편이었다. ‘신랑’이라는 호칭도 주님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말하고 있다. 신부가 감옥에 있으면 결혼할 수 있는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내려와서 마귀를 물리친 것이다. 그리고, 각 사람의 심령가운데 죄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만드셨다.
교회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의 연합이다. 성부-성자-성령의 연합처럼, 성도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연합한 공동체가 교회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각자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서로 사랑하는 그러한 교제가 ‘교회’다. 신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중매장이로 낮췄다. 신랑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마다 ‘강도’(强盜)다. 만약, 어떤 성도가 성령으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을 절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면 안된다. 정죄하는 자마다 죄를 짓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행하심을 판단하고 정죄했다. 성령으로 행하는 자는 사랑으로 연합할 뿐, 정죄함이 없다.
주님을 신랑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 혹은 어떤 사람을 신랑으로 삼고 사는가? 스스로 물어야한다. 2:20에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라고 했는데, 십자가 사건을 말한다. 부활후 주님은 다시 신랑으로 오셨다. 오순절 때 주님은 성령으로 믿는 성도들의 심령속에 들어오셨다. 성령을 맞은 자는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한 자다. 그래서, 어린양의 신부는 믿는 성도이며, 신부된 교회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살아야한다. 다른 복음은 구원이 없다. 주님 외에 다른 사람을 신랑으로 삼으면, 영적 족보가 바뀐다. 주님을 신랑으로 삼는 자는 곧 하나님을 남편으로 삼는 자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