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정책은 다소 약하다. 가령, “칼을 칼집에 넣어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죄를 용서하라”, “복수하지 말라”, “천국은 밭에 뿌린 씨와 같은데, 돌밭에 뿌린 씨는 새가 먹느니라”, “인자는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고, 죽으리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인자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닭이 울기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했고, 베드로는 그것을 입증했다. 주님의 약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마가복음 4장에 씨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무엇인가? 그 본질이 여기에 있다. 마태복음은 13장에 있고, 마가복음 4장이다. 누가복음은 8장이다. 마태복음은 복음서의 정중앙에 씨뿌리는 비유가 들어있다. 마가복음은 씨뿌리는 비유를 선포하시고, 곧바로 공동묘지 거라사인 군대귀신들을 물리쳤고, 혈루증 여인을 치료하고, 야이로의 딸을 죽은데서 살렸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직접 가서 군대귀신들을 없앴다고 하면, 믿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실제로 행하셨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하셨다. 3가지 큰 표적앞에 씨뿌리는 비유가 선포된다. 주님은 세상앞에 ‘씨’와 같지만, 생명력있는 씨앗이다.
씨앗은 돌밭, 길가밭, 가시밭, 옥토밭에 뿌려진다. 심령의 밭, 마음의 밭이다. 가령, 공동묘지에 가서 군대귀신을 물리쳤다. 그 사건이 씨앗이다. 거라사인에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을 반대했다. 귀신들린 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증인이 있는데도, 그들은 반대했다. 왜냐면, 돼지떼 2천마리가 희생됐기 때문이다. 주님이 도시안에 들어오면, 어떤 경제적 피해가 있을지, 걱정돼니 주님을 거부한 것이다. 결국, 귀대귀신이 들렸던 그 사람만 ‘옥토밭’이 된 것이다.
나는 주님을 믿고, 믿으려고 한다. 내 삶은 광풍속에 있다. 아무리 살아봐도, 경제적 여건은 나아지지 않는다. 집값은 하늘까지 치솟는데, 경제적 지혜를 갖지 못한 나는 집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주님은 인자로서,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세입자 신세다. 경제적 여건의 열악함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심란한 마음이다. 홀로 있을 때, 내 마음을 괴롭히는 각종 광풍들은 술로도 해결되지 않고, 드라마로도 치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께 부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한다. 그럴때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지만, 그것도 그때뿐이다. 한번 찾아온 평온이 영원하다면, 영원하다고 말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마음속에 광풍은 자주 밀려온다. 그럴때마다 마가복음 4장을 생각한다.
주님께서 분명히 “바다야 잠잠하라”고 하셨더니, 바다가 잔잔해졌다. 이는 창세기 1:2을 뜻한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수면위로 날으시면서 미친 광풍을 잔잔케 하신다. 성령의 바람은 고요하며, 사람에게 설레임을 준다. 마음이 어떠한가? 불안한가? 악령이 불어오는 바람이다. 주님께 기도하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다. 주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청와대 신문고를 두드리면, 그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3달 넘게 걸리지만 대부분 요식행위로 끝난다. 그러나, 주님께 기도함으로 메달리면, 주님은 즉시 그 문제에 착수한다. 성경은 ‘기도하면 즉시 응답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적으로 그것을 증언한다. “아직 해결이 안됐는데요…”라고 묻겠지만, 기도했으면, 이미 이뤄진 것이다. 받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다. 기도의 씨앗이 결실을 이룰 것이다.
가야할 목표가 있는데, 갑자기 장애물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광풍이다. 그때마다 기도해야한다. 기도하면, 주님께서 보호해주신다. 주님은 어떤 자격도 논하지 않았다. 주님을 찾는 제자들의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셨다. 어떤 댓가를 바라지도 않으셨다. 그냥, 바람아 잔잔하라고 꾸짖으니, 바람이 순종했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세상을 살면서, 믿음이 부족하면 마음속으로 세상 광풍이 들어온다. 세상 광풍은 세상속에 불어갈 것이다. 그 광풍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안된다. 마음이 침몰하면 안된다. 마음속에 세상 두려움이 없다면,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다. 천하의 높은 산이 물에 잠겼어도 노아의 배는 물위에 떴다. 그처럼 믿는 성도의 마음은 성령의 비둘기처럼 세상 수면위로 떠올라야한다.
창세기 1:2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로 운행한다고 했다. 혼돈하고 공허한 땅, 깊은 흑암의 바다 위로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로 운행하신다. 그곳이 어디에 다시 나타났는가? 바로, 씨뿌리는 비유를 선포하시고,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불었고, 도착한 곳이 공동묘지였다. 공허한 공동묘지와 깊은 흑암의 광풍이 몰아치는 그곳에 주님이 탄 배가 있었다. 그 배가 바로 ‘노아의 배’이며, ‘교회’이며, 성령을 받은 심령의 배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으나, 그 무덤이 광풍을 잠재운 안식의 배였다. 사람들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전혀 다르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듯이, 주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마치 공동묘지에 있던 귀신들린 자가 구출을 받듯이, 광풍속에서 바다가 잔잔해지듯이, 주님은 부활의 몸으로 걸어서 나오셨다. 지금, 주님은 모든 심령을 방문하신다. 믿기지 않지만, 믿자!! 주님의 부활은 실제 뉴스다.
막4:35에 “그날 저물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다. 주님께서 가자고 하셨고, 제자들은 주님에게 이끌렸다. 성령께 이끌려서 유대광야로 가셨던 주님이다. 결국,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공동묘지에 도착한 것은 주님께서 요단강물에서 세례를 받고, 유대광야로 내몰린 것과 같다. 유대광야에 마귀가 있었듯이, 공동묘지에 군대귀신들이 있었다. 주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통해 제자들을 모두 세례를 준 것이다. 그들은 세례를 받고, 주님을 향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고백한다.
세상권력은 광풍으로 광풍을 몰아낸다. “혁명”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만, 결국 백성은 피폐한다. 근본적인 광풍은 사라지지 않는다. 로마제국이 그러했고, 모든 정치제도가 동일하다. 적페청산을 없애겠다고 칼을 뽑지만, 그 칼이 적폐청산의 대상이 된다. 숙청은 숙청을 낳고, 복수는 복수를 만든다. 악의 순환이다. 주님은 “광풍”을 근본적으로 없앤다. 먼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두 번째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것을 없앤다.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롭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마음의 수면위에 주님이 오시는가? 그가 걸어오고 있는가? 그를 맞이하라. 그를 영접하라. 평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