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무도 모른다’는 ‘진정한 가족과 우정’에 대해, 종교적 측면에서 다룬다. 범죄 추리 드라마이지만, 본질은 ‘가족애’다. 윗층 아줌마와 아래층 아들은 서로 친구다. 7년 넘게, 편하게 서로 대화를 나누고, 라면도 함께 먹는 그런 사이다. 어느날, 고은호가 크게 다쳤고,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난다. 학교폭력문제인 듯 하지만, 그 실체는 거대한 종교범죄가 개입된다. 종교인들이 믿는 신념에 의해서 뭔가를 조직적으로 행하는데, 선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 윗층 아줌마가 몸살이다. 그래서 쇼파에 누워있다. 2층에 사는 고은호가 3층에 올라갔더니, 아줌마가 누워있다. 매우 평범하게 물어본다.
“왜 누워있어요?”
“내 집이야.”
“어디 아파요”
“몸살이야.”
“잘됐다. 몸살은 쉬라는 신호예요”
은호가 이렇게 말하더니, 베란다로 가서 물뿌리개로 식물에 물을 뿌린다. 인생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데, 드라마가 내 마음에 소리치더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안녕과 안부를 묻는 사이가 친구사이다. 함께 라면을 끓여 먹는 사이가 편안한 사이다. 주님은 제자들과 아침밥, 저녁밥을 함께 드렸다. 마지막 만찬도 주님은 제자들과 했고, 살아나신 후에도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먹을 것을 드렸다. 디베랴 호수에서도 아침밥을 함께 하셨다. 마태를 전도할 때는 ‘죄인들과 식사’를 하셨다. 엘리야는 까마귀들이 가져다주는 떡과 고기를 아침과 저녁으로 먹었다. 이런 사소함이 진실한 사랑이다.
편한 사이는 무엇인가? 함께 있어도 마음속에 감출 것이 없는 사이다. 형식은 항상 불편하다. 마음속에 감춘 것이 많으면, 있는 시간 내도록 불편할 뿐이다. 가족은 함께 밥을 먹는다. 그처럼, 가족은 서로 감출 것이 없다. 누가 아프면, 아픈 것을 함께 공감하는 것이다.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은 엄마, 영혼을 자라게 하는 것은 또 다른 존재가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드라마를 보면서,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동생인가”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때 주님은 빙 둘러앉은 제자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요, 동생들이다”라고 하셨다. 날마다 동고동락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며, 형제며, 동료이고, 친구다. 함께 라면을 먹고, 함께 밥을 먹는 관계가 진정한 동료다. 주님은 죄인들과 식사를 하시면서, 죄인의 자리로 낮아지셨다. 십자가에 못박힐 때는 불법자들의 동류가 되셨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