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음식물 쓰레기는 소화되지 못한 배설물이다. 소화된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매일 아침 나는 눈으로 그것을 확인한다. 엄지와 검지로 봉투 끝을 잡고, 음식물 쓰레기를 새벽에 버렸다. 골목에 바람이 분다.
구석에 버려진 그 봉투를 한참 쳐다봤다. ‘버리다’는 동사가 내 정신을 흔들었다. 나는 봉투를 버렸고, 그 봉투는 버려짐으로 나를 떠났다. 겉보기에는 지저분하지만, 그 안에 ‘내’가 담겼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주님은 그렇게 버려졌노라.
요한공동체에 대한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화들짝 놀랬다. 그 동안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현실이 새롭게 펼쳐진다. 이단이다. 기득권에 대한 새로운 종파로서 ‘이단’의 개념이 보편적 개념인데, 요한 공동체는 2가지 이단개념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교가 정의한 이단, 다른 하나는 요한 공동체가 정의한 이단이다. 성경적 이단은 그 기준이 예수님이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출애굽’처럼 ‘출갈대아’다. 요한공동체는 유대교를 떠났다. 유대교가 버렸으나, 버려짐으로 떠난 것이다. 이단의 봉투에 담겨져 분리됐다.
아브라함을 떠난 사람이 있다. 롯이다.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로 갔다. 롯의 떠남은 ‘출애굽’이 아니다. 오히려,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듯 세상속으로 복귀한 것이다. ‘떠남과 버림’은 그 속성을 깊게 파악해야한다. 어디서 어디로 갔는가? 그 기준점은 예수님이다.
신흥종교는 이단의 개념에서 그 기준을 변질시킨다. ‘기득권’을 기준점으로 정하고서, 자신들이 당하는 ‘핍박’이 마치 ‘정당한 이단’인 것처럼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주적 상속자는 예수님인데, 신흥종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단의 교주가 새로운 주인이면, 그곳은 요한1서가 말하는 그 이단이다.
조감도(鳥瞰圖)는 새처럼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다. 독수리 날개치듯 위에 올라가서 하늘의 관점으로 판단하면 모든 일은 명확하다. 성경은 그 기준이 변함없다. 시작도 하나님, 끝도 하나님, 지금도 하나님이다. 땅에 오신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영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