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는 ‘필사적 투쟁’이 있다. 공관복음에서 오병이어는 오천명의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고, 12바구니에 남는 것을 거두고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요한복음 오병이어는 ‘비극적’이다. 결말이 아주 슬프다. 단지,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라고 하지만, 주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으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오병이어 사건은 ‘새드엔딩’이다.
주님은 자신을 소개하길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이 말씀이 너무 어렵다면서 자기 갈 길을 갔다. 왜 그랬을까?
“생명의 떡”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은 버려졌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을 때도 제자들이 도망쳤다. “생명의 떡”은 곧 예수님인데, 그것을 받아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부활의 십자가’는 사람이 보기에 ‘죽음’이다. 오천명이 모였을 때, 주님은 오병이어도 없었다. 안드레가 가지고 왔을 뿐이다.
빌립은 조금씩 먹게 하더라도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2천만원이 있어야만 오천명이 허기를 채울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던 주님은 오병이어를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다. 그 일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가? 그것을 검증하려는 자들도 있겠지만, 복음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떴다. 봉사였을 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떴는데, 주님은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봉사는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을 알지 못했다.
5:12에서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했다.
어떤 사건이 해결되었다면, 주님께서 행하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홍해가 갈라진 것은 밤새도록 동풍이 불어서 갈라진 것이 아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서 가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동풍으로 갈라지게 한 것이다. 행하신 근본자는 항상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먹는 떡’으로 살 수 밖에 없다. 주님도 유대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마귀가 돌떡을 주려고 했을 때, 주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마귀가 주는 떡이어서 그렇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권력, 떡, 능력에 의지해서 사셨다.
“생명의 떡” 과연 무엇을 생명의 떡으로 삼고 살고 있는가? 생명의 원천을 어디에 놓고 사는가? 주님은 오병이어조차 하나님께 드림으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믿게 하셨다.
왜 주님은 십자가를 받아드렸을까? 하나님께서 십자가로서 주님께 행하셨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표적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표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십자가에서 죽으시듯, 주님은 배가 고파서 집으로 돌아가는 오천명을 그대로 보셨을 것이다. 능력은 경제적 풍요가 아니다. 그들이 주님을 ‘권력의 왕’으로 임금 삼으려고, 억지로 붙들어 매려고 하자, 주님은 그들을 떠나서 혼자 산으로 가셨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속에서 ‘사건적 오병이어 표적’을 많이 일으킨다. 다윗의 돌맹이가 골리앗을 죽이듯, 볼품없는 오병이어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 그때, 그 일을 행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항상 숨겨져 있다. 사람이 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앞에 낮아질지라! 하나님이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생명의 역사, 생명의 떡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떠나면, 오천명, 오만명, 오백만명이 모일지라도 ‘죽음의 떡’일 뿐이다. 누구를 진정 의지하는가? 지도자인가? 하나님인가? 자신인가? 세상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생명의 떡으로 삼고 살지라.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