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에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누가의 편집으로 4가지 사건이 함께 묶였다. 백부장, 나인성 과부, 세례요한, 향유옥합 여인이다. 남자+여자+남자+여자이다.
죽음!! 사랑하는 부하가 죽을 병에 걸렸다. 심장마비가 오거나, 원인모를 병이 찾아왔을 때, 사람은 속수무책이다. 백부장이 그러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부하가 죽게 생겼다. 병은 곧 침략자다. 다급하게,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다. 예수님이 집에 오지 않았는데도 부하의 병이 나았다.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지 않으셔도, 죽을 병에 걸린 모든 사건들이 치유된다. 성령의 능력이요, 은혜다.
나인성 과부는 더 슬프다. 사랑하는 독자요, 청년인데, 나인성에서 이미 죽어서 왔다. 장례행렬이 지나가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의 통곡을 보고서,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을 일으켜 세웠다. 과부가 메달린 것도 아니다. 죽은 청년이 예수님을 부른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긍휼히 여기시고 행하신 것이다. 주님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하시고, 청년을 살려서 과부를 위로하셨다.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놓였어도, 죽음이 엄습해도, 주님은 인생의 처량함을 보고 계신다.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은 사건을 해결해 주신다. 이것이 곧 사랑이다.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혔다. 곧 죽을 위기에 놓였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세례요한이 출옥하지 못함을 알고 있다. 백부장의 종,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았으나, 세례요한은 죽을 상황에서 죽었다. 죽고 사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 달렸다. 죽음에 처한 자가 사는 것, 죽을 사람이 아닌데 죽는 것, 모두 하나님께 달려있다. 주님을 믿으면, 죽음도 의미가 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사는 것도 죄다.
세례요한의 사건은 그 시대 제자들에게 깊은 묵시를 준다. 백부장의 종처럼,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살아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어서 무덤에 묻히셨다. 마치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관에 묻혀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세례요한도 감옥에서 목이 잘렸다. 예수님은 창에 찔렸다. 제자들도 감옥에 갇혀서 순교당했다. 그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능아래 일어나는 일이다. 세례요한 사건은 그것을 보여준다.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사건은 ‘죽음’이 없다. 4명의 인물, 4가지 사건의 공통 키워드는 분명 ‘죽음’인데,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사건에서 ‘죽음’은 없다. 백부장의 종이 죽을 병에 걸렸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고,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은 ‘죽음’이 없다.
누가는 베다니 마리아의 향유옥합 사건을 생략한 대신에 주님의 사역 초반부에 어떤 여인의 향유옥합 사건을 듣고, 앞부분에 편집했다. 결국, 향유옥합을 부은 여인의 사건은 “십자가의 구원”을 암시한다. 그 여인은 죄를 지은 여자로서, 사회적 죽음을 당했다. 차별도 죽음의 종류다. 또한,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죽음이 내포된 사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