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창훈]=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아담과 하와가 숨었고, 가인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낯은 얼굴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것은 그의 형상과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곧 사랑이다. 무엇을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통해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나, 선악과를 먹고서 숨었다. 스스로 사랑을 외면한 것이다. 그들은 은혜를 피했다. 베데스다 연못 옆에서 38년된 병자는 은혜를 받았다. 아담과 하와는 왜 은혜를 못 받았을까? 하나님 면전에서 마음을 접었기때문이다. 요나도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갔다. 곧,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사랑복음을 외면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것이다. 고래뱃속에 빠져서, 그때 요나는 참회했다.
하나님께서 떠나면, 하나님의 낯을 피한 자에게 어둠이 찾아온다. 흑암이 앉아있는 자들에게 빛이 있으리라. 아담에게, 가인에게, 요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로 주어진다. 은혜는 비처럼, 빛으로 내려온다. 베데스다 연못에 예수님 은혜가 폭우처럼 쏟아졌는데, 38년딘 병자만 비에 흠뻑 젖었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바리새인들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 율법의 역청이 칠해져 있으니, 구원의 비가 들어오지 못한다. 은혜속에서 춤을! 우산을 버리고, 빗속으로 뛰어들자. 요나처럼, 낯선 바다에 첨벙 빠지자.
계시록은 “속히” 일어날 일들을 증언한다. 1)요한에게 2)일곱교회에게 3)초대교회에게 4)모든 교회에게 5)지금 계시록을 읽는 독자들에게 속히 일어날 일들이다. 태양은 영원히 태양이듯, 예수님의 구원은 변함없다. 구원의 방법과 범위와 속성을 분명히 알아야,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계시록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자가 복되다. ‘속히 일어날 일들’에는 이미 일어난 일과 지금 일어날 일이 있다. 하나님은 각 성도의 구원을 지금도 창조하신다.
요한은 모든 것을 증거했다. 그가 본 것은 2가지로 압축된다. 1)하나님 말씀 2)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우리는 하루 가운데 무엇을 보았는가? 무엇을 읽었는가? 무엇을 깨달았는가? 어떤 것도 깨닫지 못했다면, 성경을 읽자.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법원에 가면 판사가 말하고, 병원에 가면 의사가 말한다. 약국에 가면 약사도 말한다. 성경에 가면 성령께서 말씀하신다. 읽는 자의 입술을 통해 말씀이 선포된다.
3종류의 사람이 복되다. 1)읽는 자 2)듣는 자 3)지키는 자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성직자와 성도를 말한다. 초대교회는 두루마리 성경을 성직자가 읽었고, 성도들은 들었다. 루터 이후 모든 성도들은 각자의 성경을 읽는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되다. 때가 가깝다. 곧, 복권 추첨일이 다가오듯, 가깝다. 손을 내밀면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이 만져진다. 주님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거리에 계신다. 십자가 사건으로 공간과 시간의 경계선이 허물어졌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는 거의 없다. 방문을 열면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듯,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충성된 증인, 주님이다. 주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로 증거했다. 거저 보좌에 앉은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은혜는 거저 주어졌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 거저 홍해도하와 시내산 언약을 선물로 받았다. 훗날, 가나안 땅까지 얻었다.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태어나셨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죄는 식민지다. 죄를 사하고, 죄에서 건지신 목적은 천국과 천국 시민권과 제사장 직분을 선물로 주기 위함이다. 사도 요한은 갑자기 볼륨을 최대치로 높여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1. 각 사람이 그를 본다.
2. 그를 찌른 자들이 본다.
3.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한다.
‘보는 것’이 ‘애곡’으로 바뀌기까지 긴 세월이 흐른다. 하나님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찌른 자들이 찔렀다는 것을 깨닫고 애곡하기까지, 하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보존하신다. 십자가에서 살륙당한 어린양을 찌른 자들이 죄인이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틀렸다. 주님을 찌른 자들은 ‘우리’다. ‘나’다. ‘요한’이다. ‘베드로’다. ‘바울’이다. 모든 아담이 주님를 찔렀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애곡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 오늘, 주님을 보았는가? 주님을 찌른 자신을 보았는가? 왜, 백마탄 주님은 피뿌린 옷을 입으셨을까? 그를 찌른 자들이 그의 죽음을 볼 때, 애곡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의 위로를 받으리라. 도마는 주님의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보았다. 그때, 도마는 의심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주님의 상처는 도마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자기 죄를 발견하지 못하면, 주님과 상관없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가 네 발을 씻어주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없다”고 말씀했다. 십자가는 주님과 성도를 연합하는 ‘구원의 극적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