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4일 마태복음 4장을 읽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증 받았다. 영적인 환상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확증된 순간이다. 아마도 수많은 청중이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세례요한의 몇몇 제자들만 봤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표된 순간이다. 그런데, 다음 사건이 부담스럽다. 불편하기까지한다.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은 마귀에게 갔다. 성령에 이끌렸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마태가 기록한 것은 ‘성령에 이끌려’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시험을 받을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성령의 보호를 느낄 수도 없고, 비둘기가 내려오는 듯한 환상이 보이지도 않고, 오히려 나타난 것은 ‘마귀’다. 그 마귀는 광야에 있다고 했으나, 예수님 입장에서 광야요, 마귀에게는 풍족한 들판이다. 마귀는 떡과 성전건물과 세상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배가 고프고, 성전 꼭대기로 내몰리고, 권력에서 배제 당했다. 마태복음 3장 말미와 4장 초반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권력이 어떠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성령의 강한 감동을 받고, 그 이후에 세상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으로 기대하겠지만, 성령의 이끌림은 우리가 조종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성령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다. 어디로 끌고 가실까? 마귀가 있는 광야로 예수님은 이끌림을 받았다.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았다”라고 표현한다. 매몰찬 성령의 손길이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친 광야길은 어쩌면 성령의 이끌림일 수도 있다. 이집트 왕자로 입양된 모세도 40세에 어쩔 수 없이 도망자가 되었으나, 그 길이 성령의 이끌림이었다. 80세가 되었을 때 모세는 그것을 깨달았다. 광야로 내몰렸을 때, 모세는 자신의 인생이 버려지고, 비참하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40년간 패배자로 살았던 그는 80세가 되었을 때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을 만나, 어둡던 40년이 다시 밝아졌다. 자신이 도망친 그 길이 사실은 민족을 위해 자신이 앞서 가야만 했던 길이었다. 예수님이 내몰린 그 광야길이 어쩌면 우리가 가야할 그 광야길은 아닐까?
성전 꼭대기 시험 사건은 내게 꽤 큰 충격을 준다.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려갔다. 여기서는 ‘성령의 이끌림’도 없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려갈 수도 있다. 하물며 우리랴. 우리는 세상권력과 마귀에게 붙잡혀 현실이 감금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십자가로 메달리셨다. 어쩔 수 없는 감금상태이지만, 그 또한 성령의 보호다. 현실이 암흑같고, 때론 절벽에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이 엄습해도, 성령의 이끌림은 영원하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왜냐면, 성령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귀가 예수님을 데려가는 것처럼 보일 뿐, 하나님은 이미 마귀와 예수님을 함께 붙잡고, 끝까지 지켜보시고, 때가 되면 마귀는 예수님을 떠난다. 홍해에서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민족이 서로 분리가 되듯, 우리를 쫓던 마귀도 때가 되면 더이상 침범하지 못한다. 부활의 주님은 그래서 마귀를 다스린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마귀는 항상 조건문이다. 마지막 시험문제에서는 “만약 내게 엎드려 절하면”이라고 했다. 마귀가 제안하는 사업은 보기에 좋은 일이다. 얼마나 엄청난지,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 전체를 가질 수도 있고, 세상 권력을 얻을 수도 있다. 마귀가 사기꾼처럼 속임수로 제안한 것은 아니다. 엎드려 절하면, 세상권력을 줄 수 있으니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와 동업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와 야고보를 찾아가 하나님의 사업을 제안했다. 그 사업명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사업’이다. 마귀는 ‘세상의 아들로서 사망사업’이다. 인생이 살면서, 두가지 중에 하나를 결정해야한다. 하나님 편인가, 세상 편인가. 무엇을 하든, 성령의 이끌림 속에 있음을 믿는다면, 사망 골짝에서도 생명의 물이 흐른다. 예수님은 마귀가 있는 광야로 가서, 결국에 천사의 수종을 받게 됐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마귀의 괴롭힘은 잠시 잠깐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 마귀가 주는 진수성찬보다 성령이 주는 김밥 한 줄이 훨씬 배부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