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나와 합(合)이 맞는 소설 책, 작가를 찾는 과정에는 상당한 직관이 요구된다. 사라락 훑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목차도 없는 (친절하게 목차를 달아주는 대부분의 비문학 작품들과는 달리 소설은 목차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있다 해도 어떤 내용이 전개될 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 책이 내게 즐거움을 줄 지 숙면(熟眠)을 줄 지 판단하기 위해선 본인의 확고한 ‘글 취향’ 과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본능적 판단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흡사 만난 지 3초면 모든 게 결정난다는 소개팅 달인(達人)처럼.
가판대에 놓여 있던 어스(US)를 손에 들고 책 중간 어딘가 2줄 쯤 읽었을 때 알았다. 그간 몇 명의 작가와 만나고 이별하기를 반복하며 무료함에 빠져있던 내게 데이비드 니콜스는 완벽한 새 파트너라는걸. 그는 책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글자에는 색을 넣고 간결한 문장 호흡으로 데생의 완성도를 더한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 쯤이면 또 다른 장면으로의 전환. 주인공의 솜털 개수까지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나도 생생한 그의 필체는 심지어 위트가 넘치기까지 한다. 책을 덮을 때 쯤이면 재미난 영화 한 편 본건가 싶을 정도로.
“…엠마는 민트 콩 퓨레와 맥주혼합 양념을 한 대구 튀김 요리를 뜯어보았다. 뿌옇게 튀겨 나온 감자 침은 기계로 잘라 완벽한 직육면체 모양이었다. 그 감자 칩이 벽돌처럼 쌓여 있는 무더기 위에 양념튀김을 한 생선이 위태롭게 얹혀져 있었다. 대략 접시 바닥에서 15센티는 떠 있는 셈이었는데, 금세라도 아래쪽의 두툼한 초록 끈적이들의 바다로 세차게 뛰어내릴 기세였다. 이게 뭐 하자는 거람? 나무블록 빼기 게임인가? 조심조심, 그녀는 무더기의 꼭대기에서 감자 칩 하나를 빼내 씹었다. 딱딱하고 속은 찼다…”
-데이비드 니콜스, 원데이(One Day)-
실제로 어스(US)를 비롯한 데이비드 소설의 대다수가 영화화 되었고, 그의 문단 데뷔 역시 영화 <심파티코>의 시나리오 작가로서였다. 작가 이전에 그는 8년간 연극 배우로 활동했던 경력도 있는데, 아마 본인이라면 어떻게 연기했을 지에 대한 고민을 고스란히 담는 형태로 글을 쓰는 것 같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스토리는 상당히 뻔한 편이고 게다가 매우 상업적인 부분도 있다는 점이다.
어스 이후, 곧바로 찾아본 원데이(One Day)는 대학교 졸업 때 만나 사랑과 우정 사이 모호한 감정으로 각자의 인생을 살던 남녀가 결국 서로에게서 완성을 찾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이다. 아주 진부할 수 있는. 국내에서는 2012년에 개봉한(앤 헤서웨이, 짐 스터게스 주연)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 나는 못 봤지만 관객들 요청으로 이례적인 개봉관 확대가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책을 다 읽은 후 뒤늦게 영화를 찾아 본 나의 의견으로는 주연들의 연기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던 부분도 있지만, 작가가 미리 그려 놓은 영상을 그 느낌 그대로 완벽하게 구현한 점이 진부한 스토리를 감동과 재미로 승화시킨 가장 큰 요인인 것 같다.
작가의 뛰어난 표현력 때문에 책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소홀했던 감이 있는데, 책을 읽든 영화를 보든 나는 꼭 원데이와 어스를 순서대로 같이 볼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원데이가 사랑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라면, 어스는 힘겹게 찾은 사랑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한 책이기 때문이다. 결혼 후 서로의 어린 시절 품었던 이상, 로맨틱한 감정들을 현실이라는 타협점에 묻어 놓으면서 겪는 다소 냉소적인 느낌이 풋풋, 따뜻하기만 한 원데이와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시점의 변화도 이러한 재미에 한 몫 하는데, 원데이가 남녀 주인공의 1인칭 시점과 전지적 작가 시점을 번갈아 가며 쓰는 다소 복잡한 감정의 흐름이었다면, 어스는 가족이 있는 중년의 남자 주인공 1인칭 관점으로 한결같이 이어지고, 추측이지만 그러한 시점이 데이비드 니콜라스 본인의 시점처럼 느껴진다. 의사, 만화가, 연기자의 꿈을 꾸던, 48세 중년의 나이에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와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달까. 어스도 곧 영화화 될 예정이라니 원데이 이후 작가가 어떤 멋진 그림을 펼쳐놓을 지 기대가 된다.
* 저자 데이비드 니콜스는 어릴 때는 의사나 만화가가 꿈이었지만, 정작 1985년 브리스톨대학에 진학할 때는 영문과에 들어갔다. 졸업과 동시에 뉴욕으로 건너가 아메리칸음악연기학교에 입학, 연기자 수업을 쌓은 뒤 1991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정식 연기자로 데뷔한 뒤 낮에는 노팅힐의 대형서점에서 일하면서 영국 곳곳의 연극 무대를 전전하며 8년의 경력을 쌓았다. 그러다 국립극장 소속 배우로 3년을 일하면서 희곡과 영화각본 구성작업까지 일의 범위를 넓혔는데, 그 결과 샤론 스톤, 닉 놀테 등이 주연한 영화 〈심파티코〉의 작가로 데뷔하였다. 이 작품과 더불어 니콜스는 전업작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첫 소설 『스타터 포 텐』은 자신의 각본 작업 끝에 제임스 맥아보이와 레베카 홀 주연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가장 최근 영화 작업인 앤 해서웨이 주연의 <원 데이>까지 14편의 영화, 드라마 각본을 맡았다. 니콜스의 네 번째 소설 『어스』는, 대학에 진학하는 아들을 둔 아버지 더글라스의 목소리로 성숙한 사랑이란 무릇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해 준다. 때로는 가슴 절절하게, 때로는 폭소가 터져 나오게 만들면서…. 젊은 더글라스와 코니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이야기와 20여년 후 부부가 아들과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서로 얽히며 펼쳐지는 이 소설은, 출간 이전부터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또 러셀 크로우 등의 지지를 받으며 할리우드 영화사들 및 BBC 필름즈 등 숱한 프로덕션사들의 영화 판권 확보 경쟁이 치열했던 작품으로, 곧 영화로 만나게 될 예정이다. 이 소설로 니콜스는 런던 2014 내셔널 북 어워즈에서 올해의 작가상(UK Author of the Year)을 수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