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뜨끈한 아메리카노 세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그녀가 갈매기 눈썹을 한껏 휘며 “아니, 그 썸남이이이이.” 라고 대화를 튼다. 아침 출근길 마주한 내 얼굴을 보자마자 말하고 싶은 것을, 그나마 한 주먹 남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점심시간까지 꾹꾹 참아왔음에 나의 소중한 아메리카노를 걸 수 있다. 이번 한 주 내내 그녀의 얇고 빨간 입(脣)은 그 남자, 썸남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모터 달린 것 처럼 바쁘다.
또 시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만 여자들의 세계는 그렇다. 13번 째 같은 이야기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여자 동료가 절대 나쁘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 그 “남자” 라는 생물이 전적으로 나쁜 놈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잊어선 안된다. 잔다르크 행세라도 한답시고 바른 말 하는 순간, 그 남자보다 더 나쁜 년으로 찍혀 다시는 커피를 함께하는 호사를 누릴 수 없다. 그러니 최대한 호기심 어리고 전적으로 지지하는 눈빛을 장착하고 일단 듣는다. 어쨌든 그녀가 전달한 카톡 내용은 이렇다.
그: 주말에 뭐해요?
그녀: (한 시간 뒤) 일요일에 친구 만날 거 같아요.
그: 아, 그래요? 저는 일요일 밖에 시간이 안될 거 같은데…
그녀: (그 다음 날) 아직 날짜를 정한 게 아니었어요. 친구는 토요일에 만날 거 같아요.
그: (문제의 점심 시간까지 1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답변 없음)
몇 시간 전화도 아니고 고작 카톡 다섯 문장. 이 하나하나에 대한 그녀의 엄청나고도 장황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 지난 번 만남에 그가 넌지시 주말 일정을 물었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카톡을 보내올 거라 예상했다.
그녀: 바로 답장하면 나는 주말에 일이 없는 그런 쉬운 여자이며, 너무 매달린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내 자존심이 그런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므로 카톡의 1은 절대 없애지 않고 정확히 한 시간 뒤 토요일에 친구와 약속 있다는 거짓말을 보냈다.
그: 예상 못한 답변이다. 너무너무 당황하여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온통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 생각 뿐이다. 다시한 번 말하지만 절대 내가 매달리는 건 아니다.
그녀: 사실은 그와 마음 편히 금요일 또는 토요일에 만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고민 끝에 토요일로 약속이 바뀌었다고 둘러댔다. 절대 내가 먼저 일요일에 만나자고는
안 할 거다. 쉬워보이니까.
그: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카톡도 읽었는데 답이 없다. 나 말고도 여러 썸녀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고로 천하에 나쁜 놈이다.
하아. 어떤 의식의 흐름이 저런 해석을 만드는 걸까. 그녀만의 사전이 또는 모든 카톡 언어를 해석해 놓은 썸남썸녀 대백과사전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못 읽고 못 쓰는 문맹임에 분명하다.
보고싶어서 하루 종일 그가 눈에 어른거리는데 보고싶다는 말은 커녕 주말에 만나자는 말도 못하는 그녀. 혹시 그가 나만의 남자가 아니라 여러 여자에게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썸남일까 두려워 나도 그런 척, 쿨한 척 하는 그녀. 어쩌면 너무 여리고 귀여운 그녀의 머릿속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다.
그녀가 그를 칭하는 “썸남” 의 정의가 어쩌면 그런 식의 연애가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임을 뜻하는 지 모르겠다. 완벽히 누군가의 연인이 아니니 여럿 만날 수 있고, 이렇게 서로를 구속할 순 없지만 만나면 사귀는 것처럼 행동하는. 노래 그대로 네 것도 내 것도 아닌. 솔직히 난 이게 뭔지 모르겠고, 조금 치사하고 옹졸한 방법처럼 느껴져서 “썸” 이라는 단어의 어감조차 듣기 싫어 안쓰게 된다.
이해는 한다. 사랑하면 상처 받을 수 있고 그 상처가 너무 크기에 두렵다는 거. 요즘처럼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때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 싫을지도 모른다. 눈치만 조금 빠르면 얼마든지 재고 따지며 여러 사람 만나볼 수 있고, 그게 문제도 되지 않는데 내 전부를 한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해 건다는 건 어쩌면 바보같은 일. 그보단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마음.
이런 연애(戀愛) 재밌을까?
카톡 하나 보내는 데도 온갖 경우의 수를 고려해야 하고, 조금 모자라고 부족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그런 계산적인 연애. 글쎄. 이런 만남을 지속해 오다 결국 서로의 누군가가 된다면 당연히 괜찮지만,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썸의 무한 반복에 허덕이며 늘상 외롭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자존심 세우고 재고 따지는 만큼, 딱 그만큼, 상대도 나를 대하게 되니까. 여차해서 아니다 싶으면 쏘옥 발 빼기 쉬운. 그야말로 옹졸하고 치사한 관계. 재밌기 보단 피곤하다.
조금만 용기를 내보자. ‘나’ 라는 존재는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에 확신을 갖고, 나 역시 그런 또 다른 존재에 모든 사랑을 쏟아붓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하는 게 연애, 그게 당신이 너무나도 원하는 사랑 아닌가.
나의 귀여운 동료.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자이니 썸남썸녀 사전에 의존하지 말고 당신의 진심을 전달하라고. 그가 당신의 진심에 “NO” 라 답해도 할 수 없다. 최소한 내 남자가 아닌 사람에게 쏟는 의미없는 에너지 소비는 없을테니 미련 없이 보내주길. 그게 정말 당당하고 쿨한 여자의 연애다.